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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 즉자주의(卽自主義) 1. 즉자주의란?“즉자주의”라는 말은 좀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그 속엔 꽤 뾰족하고 중요한 미학적 태도가 들어 있다. 간단히 말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태도, 그게 바로 "즉자주의(卽自主義)"다. 다른 말로 하면 “해석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그냥 보자”라는 뜻이다. 좀 더 풀어보면 “즉자(卽自)“는 ‘곧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다. 무언가를 볼 때, 그것을 무엇의 상징이나 은유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즉자주의다. 예를 들어, 햇빛이 창문을 통과해 방바닥에 떨어진다고 하자. 즉자주의자는 그 빛을 “희망의 상징”이라거나 “죽은 엄마가 남긴 어떤 환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빛일 뿐이다. 그 자체로 충분한 어떤 것이다.2. 예술에서 즉자주의예술.. 2025. 7. 21.
예술이 스스로를 설명할 때: 자기-정의(self-definition) 1. 예술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그 재료와 형식을 드러내는 방식니체(Friedrich Nietzsche)가 말한 “투명한 단단함(luminous con- creteness)"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사실 아주 시적인 말이다. 투명하다는 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뜻이고, 단단하다는 건 물리적으로, 감각적으로 두드러진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이건 보기에는 안 보이는 것 같지만,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물질성으로 거기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유리창은 투명해서 그 너머를 보여주지만, 닦으면 뽀드득, 두드리면 똑똑 소리가 나는 단단한 물질이다. 회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림은 어떤 풍경이나 사람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그 자체로 물감, 붓질, 캔버스의 물성이 보이게 된다. ‘투명하게’ 무.. 2025. 7. 18.
자연의 문장: 한국 생태 문학 1. 한국 생태 문학의 숨결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올 때, 바람은 자주 말을 건넨다. “지금 이 나무는, 누구도 듣지 못해도 쉭쉭, 문 열듯 얘기하고 있어.” 그 바람 소리가 문장으로 흐르던 시대가 있었다. 한국 문학에서 자연은 그저 배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물이었고, 대화 상대였으며, 때로는 가해자, 때로는 피해자, 그리고 늘 증언자였다. 1990년대 들어 문학은 나무, 강, 들판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풀, 고요히 떨리는 풀잎의 초록 말… 문장은 그걸 듣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자연의 목소리가 문학을 흐르게 했지만, 그 속엔 안타까움과 위기의 울림도 있었다. 강이 오염되고, 숲이 꺾이고, 바람이 멈출 때… 작가들은 그 말없는 고통을 문장에 담았다.2. 상징과 비유생태 문학은 대.. 2025. 7. 17.
국경을 넘는 시: 한국 시 번역하기 1. 시는 어떻게 이민을 가는가?한국 시가 해외에 소개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시가 단순히 문장이 아니라, 온도이고, 숨결이고, 눈치이고, 말해지지 않은 것들의 진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번역하란 말인가? 시를 번역한다는 건 시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일이다. 단어 하나하나에 실린 문화와 정서, 어감의 미묘한 떨림까지 다른 언어로 갈아 끼워야 한다. 번역자는 그저 단어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시인과 편집자, 발레리나와 외교관을 동시에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번역은 “거의 같은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이라는 말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나와, 사진 속 나처럼 말이다. 발터 벤야민은 시의 번역은 원작과는 별개의 “순수 언어”로 도.. 2025. 7. 16.
파괴는 창조의 시작이다: 한국 소설의 실험 1. 실험적 글쓰기?소설이란 게 원래 그렇다. 뭔가 있어 보여야 할 것 같고, 뭔가를 말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대다수의 작가들은 ‘이야기’를 쓴다. 하지만 가끔, 어떤 작가들은 그냥 그 자체로 규칙을 부순다. “이야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붙잡고, 소설을 해체한다. 때려 부순다. 그러다 다시 붙인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문장은 뭔가 어긋나 있고, 낯설고, 당황스럽지만, 그 불편함이 바로 새로운 시작이다. 그걸 우리는 실험적 서사라고 부른다. 문학이 문학 바깥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들이다. ‘실험’이란 단어가 어렵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기존의 소설이 양복 입은 신사라면, 실험 서사는 청바지에 찢어진 티셔츠 입은 펑크족과 가깝다고.2. 실험 소설의 이론적 뿌리: 미하일 바흐친과 롤랑 바르트실.. 2025. 7. 15.
설화는 죽지 않는다: 현대 문학 속 다시 살아난 이야기들 1. 오래된 이야기누가 이야기의 유통기한을 정했을까? 산신령, 호랑이, 처녀귀신이 나오는 이야기를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설화들이 한국 현대문학 속에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허공에 ‘털썩’ 내려앉은 먼지처럼, 아주 조용하게. 설화란,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다. 보통 ‘전래동화’ ‘민간신화’ ‘옛날이야기’로 불렸고, 구체적인 작가는 없지만, 이야기의 뼈대는 상상력과 삶의 지혜로 다져졌다. ‘흥부전’에서 ‘심청전’까지, 이 이야기들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살아남기 위해 꾸며낸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말들”이다. 1980년대 이후, 문학이 단순한 리얼리즘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작가들은 전통 설화 속 인물들과 플롯을 다시 호출한다. 대표적으로 박상륭 작가의『칠조어.. 2025. 7.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