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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깨어나는 순간: 방혜자가 남긴 생명의 흔적들 1. 어둠을 투과하는 영원의 빛: 방혜자가 남긴 생명의 흔적을 따라서겨울의 끝자락, 국립현대미술관(MMCA) 청주의 고요한 복도를 걷다 보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빛의 줄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 빛은 눈을 찌르는 강렬한 인공조명이 아니라, 오랜 시간 대지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가 비로소 숨을 내뱉는 것 같은 시원(始原)의 빛이다. 작가 **방혜자(Bang Hai-Ja)**의 작품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고요한 박동이자, 고단한 삶을 어루만지는 다정한 손길이다. 이제 곧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대중을 만날 고(故) 방혜자 작가는 '빛의 화가'라 불린다. 하지만 그녀가 그린 빛은 우리가 흔히 아는 전등의 빛과는 다르다. 그녀는 어둠이 있기에 빛이 존재함을, 그리고 그 빛이 우리 내면.. 2026. 2. 18.
검은 불꽃의 침묵, 숯의 영혼을 깨우다: 이배가 그리는 시간의 궤적 1. 검은 불꽃의 침묵, 숯의 영혼을 깨우다: 이배가 그리는 시간의 궤적안도 타다오의 건축적 미학이 살아 숨 쉬는 '뮤지엄 산(Museum SAN)'의 긴 복도를 걷다 보면, 우리는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어떤 강렬한 '검은색'과 마주하게 된다. 그 검은색은 단순히 색채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수천 도의 열기를 견뎌낸 나무의 마지막 외침이자, 동시에 모든 색을 품고 다시 태어난 생명의 정수다. 작가 **이배(Lee Bae)**의 작업은 언제나 거대한 명상과 같다. 그는 숯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이고도 원초적인 매체를 통해 서구 현대미술의 문법 위에 동양적 사유를 덧입힌다. 이제 곧 뮤지엄 산에서 펼쳐질 그의 전시를 앞두고, 우리가 왜 이 '숯의 예술가'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는지, 그의 삶과 예술 .. 2026. 2. 16.
우연이 선물한 유연한 연대: 포스트잇이 건네는 사유의 조각들 1. 우연이 선물한 유연한 연대: 포스트잇책상 귀퉁이에 무심코 붙여놓은 노란 종이 한 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가벼움이 주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포스트잇(Post-it)**은 단순한 사무용품을 넘어 인간의 기억과 소통의 방식을 바꾼 혁명적인 매개체로 다가온다. 그것은 단단하게 고착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순간 적절한 자리에 머물 줄 아는, 지극히 유목민적인 속성을 지닌 사물이다. 우리는 이 작은 종이 조각을 통해 일상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타인과 연결되며, 때로는 거대한 담론을 형성하기도 한다.2. 실패라는 토양에서 피어난 우연의 미학포스트잇의 탄생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패의 재해석'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이다. 1968년 3M의 연구원 스펜서 실버는 강력 접착제를 개발하려다 실수.. 2026. 2. 13.
진실을 말하는 위험한 용기: 파레시아(Parrhesia)라는 삶의 예술 1. 파레시아(Parrhesia), 벌거벗은 진실의 목소리고대 그리스어로 '모든 것을 말함'을 뜻하는 **파레시아(Parrhesia)** 파레시아는 고대 그리스어 '판(pan, 모든 것)'과 '레시스(rhexis, 발화)'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다. 이 개념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킨 미셸 푸코에 따르면, 파레시아는 단순히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이와 말해지는 진실 사이에 강력한 유대와 위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혼돈을 말하지만, 반대로 배트맨이나 고든 형사는 파멸의 위협 앞에서도 시스템의 진실을 지키려 한다. 파레시아는 바로 그 고든 형사가 부패한 경찰 조직 안에서 홀로 진실을 말할 때 발생하는 도덕적 에너지와 같다. 그것은 세련된 거짓말이나 .. 2026. 2. 11.
렌즈에 담긴 침묵의 서사: 소여헨(So Yo-hen)이 그리는 이주의 풍경 1. 렌즈에 담긴 침묵의 서사: 소여헨(So Yo-hen)이 그리는 이주의 풍경소여헨(蘇育賢, So Yo-hen) 감독의 영상은 마치 그 사진 속 인물들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말을 거는 것과 같은 기묘한 진동을 일으킨다. 그는 단순히 기록하는 자가 아니라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존재들의 목소리를 빛과 그림자로 빚어내는 연출가이자 수행적 예술가이다. 대만 출신의 이 젊은 거장이 보여주는 미학은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2. 타이난의 골목에서 베네치아의 무대까지1982년 대만 타이난에서 태어난 소여헨은 대만 국립 예술대학교(NTUA) 미술학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며 예술적 기반을 닦았다. 그는 2011년 제54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대만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었는.. 2026. 2. 9.
나무와 돌의 숨결을 깨우는 영원한 이방인: 김윤신 조각가 1. 나무와 돌의 숨결을 깨우는 영원한 이방인: 김윤신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 그녀의 조각은 나무와 돌이라는 단단한 물질 속에 숨겨진 우주의 원형을 끄집어내는 집요한 대화의 산물이며,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장엄한 서사시를 이룬다. 그것은 단순히 정교하게 깎인 목재가 아니라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온 생명체가 작가의 거친 손길을 만나 내뱉는 깊은 숨결처럼 느껴진다. 1935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윤신은 1959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각과를 졸업하며 한국 현대 조각의 태동기에 본격적인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1964년부터 1969년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인 보자르(Beaux-Arts de Paris)에서 수학하며 서구 현대 조각의 정수를 흡수했고, 귀국 후 한국여류조각가회를 창립하는.. 2026.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