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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이후' 혹은 비판 '너머'의 가능성: 포스트크리틱(Postcriticism) 1. 의심의 안경을 벗다: 비판적 읽기의 피로감우리는 언제부터 책을 읽으며 '감동'하기보다 '의심'하기 시작했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에도, 머릿속 한편에서는 이 작품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숨기고 있는지, 감독이 나를 어떻게 기만하고 있는지 분석하려 애쓰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문학 연구자 리타 펠스키(Rita Felski)는 바로 이 지점, 즉 우리가 예술을 대할 때 습관적으로 장착하는 '차가운 현미경'을 잠시 내려놓자고 제안한다. 그녀가 세상에 내놓은 '포스트크리틱(Postcriticism)'이라는 개념은 예술을 난도질하여 해부하는 대신, 그 작품이 내 삶에 어떤 파동을 일으키는지, 왜 내가 이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솔직하게 고백해 보자는 다정한 권유다. 우리가 학교에.. 2026. 4. 23.
침묵하는 벽이 건네는 진실의 증언: '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 1. 사물이 말하게 하는 법: 포렌식(Forensic)의 현대적 변주창밖으로 쏟아지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다 문득 우리가 사는 이 공간들이 품고 있을 기억에 대해 생각한다. 벽돌 한 장, 깨진 유리창의 각도, 심지어 공기 중에 흩어진 연기의 흐름까지도 사실은 세상의 모든 사건을 지켜본 목격자가 아닐까 하는 공상 말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진실이 권력의 어둠 속에 묻히고 사라져 갈 때, 건물의 뼈대와 디지털 데이터의 파편을 엮어 그날의 진실을 복원해 내는 이들이 있다. 2010년 영국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교정에서 태어난 '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라는 이름의 조사 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에얄 와이즈먼(Eyal Weizman)을 중심으로 모인 이 건축가와 예술가,.. 2026. 4. 22.
엑소더스(Exodus)가 안내하는 인터넷의 새로운 영토 1. 단절이 품은 가능성: 구조적 구멍의 발견우리는 흔히 인터넷을 '모든 것이 연결된 그물망'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그물망 사이사이에는 누구도 밟지 않은 거대한 빈터가 존재한다. 마치 섬과 섬 사이를 흐르는 깊은 바다처럼, 혹은 거대한 대륙 사이에 놓인 소통의 단절처럼 말이다. 이러한 단절의 틈새를 찾아내고, 그 빈 공간을 다리 삼아 낯선 세계를 연결하는 매혹적인 개념이 바로 '엑소더스(Exodus)'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를 찾는 검색 엔진을 넘어, 우리가 갇혀 있는 익숙한 정보의 감옥을 탈출하게 돕는 일종의 '디지털 망명 선박'과도 같다. 엑소더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인터넷의 지형도를 그려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구조적 구멍(Structural Hole)**이라.. 2026. 4. 20.
보이지 않는 권력의 지도를 그리는 예술가: 메타헤이븐(Metahaven) 1. 디자인 그 이상의 디자인: 메타헤이븐의 탄생과 철학창밖으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디지털 정보의 파도를 바라보다 문득 우리가 사는 이 가상 세계의 '국경'은 어디인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매일 스마트폰을 만지며 국경 없는 정보를 누린다고 믿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력과 서버의 요새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복잡한 구조를 디자인과 영상, 그리고 날카로운 철학적 언어로 풀어내는 네덜란드의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예술 집단이 바로 메타헤이븐(Metahaven)이다. 빈카 크루크(Vinca Kruk)와 다니엘 판 데르 펠던(Daniel van der Velden)이 결성한 이 단체는 단순히 예쁜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로고와 브랜.. 2026. 4. 17.
거대한 그물망이 건네는 다정한 연결: 메시 네트워크(Mesh Network) 1. 징검다리가 되어주는 통신: 메시 네트워크의 본질창밖으로 쉴 새 없이 흐르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다 문득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생각한다. 거대한 기지국과 복잡한 전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이 도시에서, 우리는 단 한순간도 연결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그 거대한 기둥들이 한꺼번에 쓰러진다면 어떨까. 재난의 현장에서, 혹은 깊은 산속에서 우리의 목소리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 이런 막막한 질문 끝에 마주하게 되는 기술이 바로 '메시 네트워크(Mesh Network)'다. 중앙의 지시 없이도 서로가 서로의 징검다리가 되어 소식을 전하는 이 다정한 기술은, 마치 위기 속에서 손을 맞잡는 사람들의 연대와 닮아 있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인터넷은 대개 거대한 탑, 즉 기지국을 거쳐야 한다.. 2026. 4. 15.
끊어진 회선, 침묵의 광장: 2011년 이집트 '인터넷 킬 스위치' (Kill Switch) 1. '아랍의 봄'과 디지털 광장의 태동2011년 1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기묘하고도 공포스러운 정적이 흘렀다. 30년간 권좌를 지킨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이 시민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국가 전체의 인터넷 접속을 한순간에 끊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통신 장애가 아니라, 현대판 '분서갱유'이자 시민의 눈과 귀를 가린 거대한 장막이었다. 2011년 초, 중동에는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꽃이 이집트로 번지자, 수만 명의 시민은 타흐리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이들을 결집시킨 가장 강력한 도구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였다. 디지털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의 광장처럼, 이집트 청년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부패.. 2026. 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