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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실로 꿰매는 그 행위: 쑬루세 (suture) 1. 쑬루세 (suture)쑬루세는 프랑스어다. 의미는 단순하다. 꿰매기, 봉합하기. 상처를 실로 꿰매는 그 행위다. 이 단어가 영화이론으로 들어왔을 때, 뜻은 조금 달라졌지만 중심은 그대로다. 쑬루세란, 영화가 관객을 화면 속 세계에 ‘꿰매 넣는’ 방식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이렇다. 영화는 계속 말한다.“이건 그냥 화면이 아니야. 이 안에서 보고, 느끼고, 판단해.” 우리는 그 제안에 거의 저항하지 않는다. 쑬루세는 강요가 아니라 습관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2. 처음에는 언제나 구멍이 있다모든 영화는 처음에 구멍으로 시작한다. 화면이 켜지는 순간, 우리는 묻는다. 이 장면을 누가 보고 있는 걸까? 이 카메라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 왜 이걸 지금 보여줄까? 이 질문들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 2026. 1. 7.
2026년- 연하우표란 무엇일까. 1. 연하우표란 무엇인가연하우표는 말 그대로 한 해 동안 발행된 우표를 모아 만든 공식 기록물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우정사업본부가 매년 발행한다. 그 해에 나온 기념우표, 보통우표, 특별우표 등이 한 권의 우표첩 안에 정리된다. 쉽게 말하면, 연하우표는 “그 해의 국가적 표정”이다. 어떤 해에는 문화유산이 많고, 어떤 해에는 과학기술이나 스포츠가 중심이 된다. 우표는 국가가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지를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매체 중 하나다.2. 대한민국 연하우표의 시작대한민국에서 연하우표가 본격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정확히는 1974년부터 ‘연하우표첩’이라는 이름으로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우표는 있었지만, ‘한 해를 정리한다’는 개념은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산.. 2026. 1. 5.
〈웃음이 먼저 쓴 문장 – 엘렌 식수, 말해지지 않은 몸의 글쓰기〉 1. 엘렌 식수 (Hélène Cixous)엘렌 식수.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하면, 어딘가에서 새가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단단한 철학자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숨과 웃음과 균열이 섞인 어떤 제스처처럼 들린다. 실제로 그녀는 철학자이자 문학이론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며 극작가이고, 무엇보다 **글을 ‘몸으로 쓰는 사람’**이다. 엘렌식수는 1937년, 프랑스령 알제리 오랑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여성으로 식민지의 공기를 마시며 성장했다. 이미 그 출발부터,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정체성으로는 도착할 수 없는 삶이었다. 엘렌 식수는 늘 경계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경계에서 글을 썼다.2. 그녀는 무엇을 문제 삼았는가식수가 평생 붙잡았던 질문은 단순하다. “왜 글은 늘 같은 목소리로 쓰여 왔는가?” 이 질문.. 2026. 1. 1.
세계는 잡음 속에서 온다: 단파(SW, Shortwave) 라디오 1. 단파 (SW, Shortwave) 라디오낡았지만 기능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품게 되는 물건. 단파라디오는 그런 물건이다.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지만, 한때 우리는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전파 속에서 세계를 들었다. 단파라디오는 그 공기 속의 길, 먼 곳에서 날아온 목소리들이 좁은 금속 통 속으로 모여드는 기묘한 통로였다. 단파라는 말은 ‘파장이 짧은 전파’라는 뜻이다. 파장은 물결 하나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의 길이를 말하는데, 이 길이가 짧을수록 더 높은 주파수를 갖는다. 그런데 짧은 파장은 특이한 성질이 있다. 지구 대기권의 전리층에 부딪히면 반사된다. 마치 너무 잘 튕겨 올라가는 농구공처럼, 전리층은 단파를 다시 지구 쪽으로 내려보.. 2025. 12. 12.
사물은 왜 거기에 있는가, 라는 오래된 질문: 형이상학(Metaphysics) 1. 형이상학 (Metaphysics) 언젠가 늦은 오후, 서가 앞에서 낡은 책을 꺼내 들었던 적이 있다. 책장은 약간 휘어 있었고, 종이는 햇빛에 바래 있었다. 그런데 그 물건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 그 단순한 존재감이 이상하게 마음을 끌었다. ‘왜 이 책은 이 자리에, 이 순간, 이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불쑥 들어왔다. 형이상학은 바로 이런 순간에 시작된다. 보이는 것 너머를 향해 시선을 조금 옆으로 기울이는 행동. 사물에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는 아이의 놀라움처럼. 고대 철학자들은 이 세계의 바깥, 그보다 한 층 깊은 자리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했다. 눈앞의 물건들, 사건들, 감정들 뒤편에서 조용히 흐르는 원리를 찾고 싶어 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의 배.. 2025. 12. 10.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에 관하여: gender performativity 1.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에 관하여아침에 거울을 본다. 누구에게 보여줄 얼굴인지 생각한다. 직장에 갈 때와 연인을 만날 때, 친한 친구와 술자리로 향할 때. 표정이 다르고, 몸짓이 다르다. 내가 선택하는 옷 하나 말투 하나에도 내가 어떤 사람이길 원하는지가 스며 있다. 우리는 그걸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주디스 버틀러는 묻는다. 정말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우리가 반복해서 ‘연기해 온’ 것일 뿐인가? 버틀러는 ‘젠더는 수행(performance)된다’고 말했다. 무대 위 배우처럼 우리는 매일 ‘여성다움’이나 ‘남성다움’을 연기한다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본래 우리 속에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사회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길 바라는지를 보여주었고, 우리는 그.. 2025. 1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