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75 사라지지 않는 것의 법칙: 항등성 1. 항등성어떤 개념들은 처음 들으면 아리송하다. ‘항등성’이라는 말도 그렇다. 하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여 보면 이 단어는 우리 모두가 매일 아주 친밀하게 쓰고 있는 세계의 법칙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있어도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어떤 원칙이다. 평범한 삶에 갑자기 도착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항등성은 그렇게 우리 곁에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2. “아무리 달라 보여도 결국 너는 너다”의 법칙우리가 쓰는 숫자나 문장, 혹은 사물들은 여러 형태로 바뀌어도 여전히 같은 의미를 지닐 때가 있다. 그 ‘의미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 바로 항등성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마트에 가서 우유를 산다고 치자. 우유 팩의 겉모습은 바뀔 수도 있고, 브랜드가 조금씩 달.. 2025. 11. 17. 아주 먼 곳에서 오는 라디오 신호를 잡는 일: DXing(Distant Expedition) 1. DXing (Distant Expedition)어린 시절, 나는 밤마다 작은 단파라디오 앞에 앉았다. 지금은 다들 잊고 지내는 싸구려 플라스틱 라디오는 미세한 잡음을 토해냈다. 그 잡음 속에서 간혹, 세계를 건너오는 목소리들이 들릴 때가 있었다. 영어인지 일본어인지 모를, 혹은 그 어디 중간쯤에 자리한 이상한 리듬의 언어들이 파도처럼 들락거렸다. 나중에서야 그 행위가 바로 DXing—‘Distant Expedition’, 멀리 있는 신호를 찾아 나서는 사소하지만 집요한 원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DXing는 귀의 모험이었다.2. DXing이란 무엇인가: 긴 안테나를 든 탐험가간단히 말해 DXing은 아주 먼 곳에서 오는 라디오 신호를 잡아내는 일이다. 그것은 대륙을 가로질러 넘어오는 .. 2025. 11. 14. 누군가의 말이 내 안에 머물다: 증언적 믿음(testimonial belief) 1. 증언적 믿음(testimonial belief)어느 늦은 오후였다. 전기포트에 물을 데우며, 오래전 엄마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비가 오면 할머니가 무릎이 쑤셨다고 했지.” 그 말은 설명도, 근거도 없이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할머니의 무릎도, 그녀의 통증도 직접 본 적 없지만, 이상하게 그 문장은 오랫동안 ‘사실’처럼 남았다. 철학에서는 이런 식의 믿음을 **증언적 믿음(testimonial belief)**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직접 보거나 경험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말에 의지하여 받아들이는 믿음. 사람은 대부분의 세계를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타인의 말을 통해,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그 말이 스며든 작은 문장들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증언적 믿음은 그래서 불완전하고, .. 2025. 11. 12. 사물의 비밀한 생: 객체지향존재론, Object-Oriented Ontology, OOO 1. 객체지향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OOO창가에 앉아 오래된 찻잔을 바라본 적이 있다. 가장자리가 약간 깨져 있었고, 그 금이 햇빛을 받아 은근하게 빛났다. 손끝으로 만져보면 그 틈새는 아주 작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찻잔은 나 없이도 존재할 수 있을까?’ 객체지향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이하 OOO)은 그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세계의 중심에 인간이 아니라 사물이 있다는 급진적인 생각. 인간이 사물을 ‘이해하고’, ‘사용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가 아니라, 사물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철학. OOO의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 2025. 11. 5. 사물의 온도를 느끼는 일: 대중 예술 속 현상학 1. 현상학 Phenomenology 現象學어느 날 퇴근길, 커피를 들고 골목을 걷다 멈춰 선 적이 있다. 바람이 불어 종이컵의 표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작은 진동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때 문득 ‘지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어졌다. 현상학은 바로 그런 물음에서 시작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후설(Edmund Husserl)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 그 자체로 돌아가라.” 그는 철학이란 머릿속의 추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세계의 경험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복잡하게 들리지만, 사실 일상의 단순한 감각 속에 있다.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음악을 듣는 일, 우리는 늘 어떤 ‘대상’을.. 2025. 11. 3.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Hot in Day, Cold at Night, 2021): 너와 나의 온도 1.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Hot in Day, Cold at Night)"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라는 제목은 단순한 날씨 묘사 이상을 말한다. 낮의 더위는 일상에서 견디는 삶의 긴장감, 밤의 추위는 삶이 놓인 빈 공간 혹은 외로움의 온도처럼 다가오는 감각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버티기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놓여 일자리 불안정, 소비 압박, 관계의 빈도와 기대 사이의 간극 등 삶을 흔드는 요인들을 무대 위로 조용히 올려놓는 작품이다.2. 줄거리영태와 정희는 부부다. 영태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정희 또한 살림을 책임지며 여러 아르바이트를 거치고 그럼에도 쪼들리는 살림 사이에서 긴장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정희 어머니의 생일이 다가오고 다른 형제들은 선물로 돈을 가져.. 2025. 10. 27. 이전 1 2 3 4 ··· 3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