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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에서 전쟁을 쓰는 방식: 전쟁과 트라우마 1. 한국 문학의 전쟁과 트라우마 서사 늘 그랬다. 한 사람이 겪은 전쟁은 종이 위로는 번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조용히 국수를 말았고, 또 누군가는 아이를 업었다. 그러나 땅 밑 어딘가, 아직도 굳지 못한 흙처럼, 트라우마는 소리를 삼키며 퍼지고 있었다. 총성과 함께 기억이 뚫렸고, 그 구멍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끝내 아물지 않는 창문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기억은 정말 하나의 선으로 엮이는 걸까. 아니면 그것은, 찢어진 신문 조각처럼 흩어진 다음, 거리 곳곳에서 신발에 달라붙는 형태로만 비로소 ‘남게 되는’ 것일까. 전쟁은 국가의 이름으로 시작되지만, 고통은 이름을 가릴 것 없이 아니 이름 없이도 퍼진다. 그러므로 전쟁 문학이란 아직 붙잡지 못한 감정들의 흐름을 기록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2... 2025. 7. 1.
정착하지 못한 감정: 한국 문학 속 디아스포라 1. 한국 문학 속 디아스포라와 이주민의 서사밤이면 밤대로, 낮이면 낮대로 사람은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누군가는 먹고살기 위해, 또 누군가는 버거운 기억이나 상처를 버리려고 그리고 또 누군가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 하나만으로 ‘떠났다’고 적었다. 문학에서 그 ‘떠남’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걸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기도 한다.2. 디아스포라‘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단어는 원래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국 문학에서 이 말은 단지 지리적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가슴속에 오래 눌러 담은 감정들, 정체성을 드러내 묻고 싶은 마음, 돌아갈 곳이 있음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복잡한 감정들이 함께 실려 있다. 그러니까 디아스포라는 몸이.. 2025. 6. 30.
오토픽션(autofiction): 자아와 허구의 경계에서 1. 오토픽션(autofiction)오토픽션(autofiction)은 자전적 서사와 허구적 상상이 모호하게 얽히는 문학 장르다. 1977년 프랑스 작가 세르주 뒤브로프스키(Serge Doubrovsky)가 자신의 작품 le Fils를 ‘자전이지만 진실에 얽매이지 않는 소설’로 정의하면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그는 “진실보다 더 진실 같은 글쓰기”를 시도했고, 이 개념은 이후 21세기 문학에서 폭발적인 확장을 보였다. 한마디로, 오토픽션은 ‘나’를 말하면서도 ‘나’를 가장하는 문학이다. 진실을 말하는 동시에, 그 진실을 문학적으로 꾸며낸다는 점에서 윤리와 허구, 고백과 연기가 교차하는 장르다. 오토픽션이 중요한 이유는 이 장르가 단순히 자기 고백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고백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 2025. 6. 29.
숨 막힌 시대, 민주화 문학을 읽다 1. 문학과 민주화의 나날들처음부터 거창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냥, 1980년대에 누군가 쓴 시를 떠올릴 뿐이다. ‘이불속에서 몰래 읽던 시집, 그 시가 경찰보다 무서웠다’고 말하던 누군가의 얼굴도. 한국 문학에서 민주화 운동은, 총구보다 먼저 튀어나온 문장들의 행진이었다. 그 문장들 안엔 구호 대신 숨죽인 사람들의 입김이 있었고, 상처받은 채 조용히 걸어가는 발소리들이 숨어 있었다.2. 민주화 문학의 시작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이 죽었다. 학생들이 먼저였고, 뒤이어 어른들이 따라나섰다. 그해 여름은 더없이 뜨거웠고, 참혹했다.그 열기 속에서 누군가는 돌을 던지며 맞서 싸웠고, 또 누군가는 펜을 쥐었다. 당시의 검열은 살얼음 같았다. 시인은 시를 쓴 뒤 불태우기도 했고, 작가는 원고를 .. 2025. 6. 27.
말을 빼앗긴 문장들: 식민지 시대 문학 1. 한국 문학의 시작점식민지 시절, 우리에게서 가장 먼저 사라졌던 건, 말이었다. 그 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한국 문학은 시작됐다. 잃어버린 말들을 찾아 쓰는 것. 그게 이 땅의 문학이 처음 배운 문장 쓰기였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였다. 이 시기, 사람들은 두 가지를 잃었다. 나라와 언어. 그리고 문학은 그중에서도 말에 대해 가장 깊이 반응했다. 식민지 정부는 학교에서 조선어를 금지하고 일본어를 강요했다. 신문과 잡지,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시장에서조차 “조선말 쓰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붙었다. 그런 상황에서 작가들이 할 수 있었던 건, 우리말을 지키는 것, 우리말의 자리를 되찾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문장은 종종 숨이 찼다. 급히 써 내려간 듯, 자꾸 숨을 고르듯.. 2025. 6. 26.
문학이 계급을 말하는 방식: 보여주기 1. 문학과 계급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또렷하진 않다. 처음엔 한국 문학에서 계급 이야기를 해보자고 생각했는데, 말하다 보니 자꾸 어떤 기억들이 맴돈다. 가령, 국민학교 4학년쯤 됐을 때, 운동화가 다 해져서 새 걸 사달라고 했더니 엄마가 말했다. ‘비 오는 날만 발 안 젖으면 되잖아.’ 그 말을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날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지만, 이상하게 발끝이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가난이었다. 계급이라는 단어보다 먼저 배운 감각이었다. 문학에서도 그랬다. 직접적으로 계급이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용어가 아닌 느낌으로 나는 계급을 알아챘다.2. '난장이'의 계급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처음 읽었을 땐 그저 특이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2025.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