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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색도 아닌 색에 대하여 – 현대 미술 속 모노크롬을 걷다〉 1. 모노크롬 (mono-chrome)어쩌면 색이라는 것은 눈을 감았을 때 더 뚜렷해질지도 모른다. 어두움 속에서 한 차례 시야가 비워진 후, 눈꺼풀 너머 잔광처럼 맴도는 감정의 빛. 나는 그 순간을 생각한다. 바넷 뉴먼의 거대한 붉은 화면 앞에 섰을 때도, 로스코의 뭉개진 자주색을 마주했을 때도, 혹은 집에서 조용히 휴대폰 화면 속 흰 바탕을 바라보다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을 때도. 색은 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수행한다. 2. 모노크롬, 하나의 색이 아닌 세계의 방식모노크롬(mono-chrome). 직역하면 “하나의 색”이지만, 사실 이 말은 하나의 색으로 모든 것을 말해보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마치 하루 종일 회색 하늘 아래를 걸을 때, 기온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공기가 어떤 말로도 포착되지 않는.. 2025. 12. 2.
잊히는 것들의 강가에 서서: 레테(Lethe) 1. 레테-Lethe잊어버린다는 것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걸까? 때때로 나는 어떤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손가락 끝에서 맴도는 느낌을 받곤 한다. 눈앞까지 떠올랐던 장면이 갑자기 흐려지고, 훅 꺼져버린 촛불처럼 기억이 탄 흔적만 남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묘한 안도감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잊는다는 것은 마치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천천히 떠밀려가는 조용한 강물과도 같다. 이 잊힘의 강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레테(Lethe)"라고 불렀다. 죽은 이들이 저승으로 향할 때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 물을 마시면 생전의 모든 기억을 잊고 새로운 영혼으로 태어나게 되는 장소. 그러나 나는 레테를 단순히 신화 속 강의 이름으로만 남겨두기보다 우리의 일상 깊숙이 배어 있는 조용한 망각의 흐름으로 바라보고 싶다.. 2025. 11. 26.
기억의 강 위에 서 있는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 1. 므네모시네 (Mnemosyne)므네모시네는 그리스 신화에서 ‘기억을 맡은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기억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억을 ‘건네주고’, ‘보호하고’, 때로는 ‘숨겨두는’ 존재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웅덩이처럼, 때로는 연못, 때로는 호수처럼 우리를 비추는 물결을 만드는 여신이다.2. 기억은 늘 물결처럼 돌아온다나는 종종 기억을 바다 위의 조용한 파도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먼 곳에서 출발해 아주 느리게 다가오고, 때로는 우리가 눈치채기도 전에 발목을 적시며 지나가버린다. 그리고 이 물결을 지켜보는 존재가 바로 므네모시네이다. 우리가 기억을 떠올리는 방식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물건을 잃어버린 날의 걷잡을 수 없는 초조함, 첫사랑의 목소리처럼 흐릿해져도 잊히지 않는 .. 2025. 11. 24.
공기가 폭발할 때: 소리의 벽(Sound Barrier) 1. 소리의 벽 (Sound Barrier)오래된 골목을 지나갈 때 누구나 한 번쯤은 공기 속에 숨어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장벽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처음 그 감각을 떠올린 건 내가 뱉은 숨에 한겨울 버스 창문이 뿌옇게 흐려지던 어느 저녁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거리는 축축한 바람만이 얼음처럼 흘렀다. 그때 나는 알았다. 공기는 항상 우리 주변에 있으면서도, 때로는 우리를 가로막는 벽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소리의 벽(Sound Barrier)’이라는 표현은 원래 과학의 언어다. 물체가 음속 그러니까 약 초속 340미터쯤 되는 속도를 돌파할 때 공기가 들고 일으키는 반발의 장벽.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을 들이받는 것처럼 흔들리고, 저항이 폭발하고, 뒤이어 ‘쾅’ 하는 음속폭.. 2025. 11. 21.
오류가 예술이 되는 순간: 글리치(glitch) 1. 글리치 (glitch)살다 보면 하루가 이상할 때가 있다. 평소처럼 커피를 내리는데 갑자기 커피머신이 한 박자 늦게 숨을 쉰다든가,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늘 뛰어올라 앉던 의자를 멀찍이 바라보기만 한다든가. 아주 작은 틈새 같은 순간들 말이다.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는 빈틈 같으면서도 불길한 느낌이 드는 이상한 하루.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뭔가 한 톱니 어긋난 듯한 기분이 든다. 기계 소리가 조금 늦고, 바람이 조금 다르며, 사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그 순간을 묘사하는 단어가 있다. 우리가 은밀히 두려워하면서도 매혹되는 단어. 바로 글리치(glitch)이다.2. ‘작은 고장’이 드러내는 큰 진실글리치는 원래 기술적 용어다. 기계나 디지털 시스템에서 순간적으로 발.. 2025. 11. 19.
사라지지 않는 것의 법칙: 항등성 1. 항등성어떤 개념들은 처음 들으면 아리송하다. ‘항등성’이라는 말도 그렇다. 하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여 보면 이 단어는 우리 모두가 매일 아주 친밀하게 쓰고 있는 세계의 법칙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있어도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어떤 원칙이다. 평범한 삶에 갑자기 도착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항등성은 그렇게 우리 곁에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2. “아무리 달라 보여도 결국 너는 너다”의 법칙우리가 쓰는 숫자나 문장, 혹은 사물들은 여러 형태로 바뀌어도 여전히 같은 의미를 지닐 때가 있다. 그 ‘의미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 바로 항등성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마트에 가서 우유를 산다고 치자. 우유 팩의 겉모습은 바뀔 수도 있고, 브랜드가 조금씩 달.. 2025.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