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15 기계와 펜 사이의 투쟁: 노동 문학의 계보 1. 한국의 노동 문학거기 있었다. 철컥거리는 컨베이어 벨트 소리와, 끼익 끼익 멈칫거리는 기계음 사이에서 누군가는 시를 썼다. 누군가는 소설을 썼다. 누군가는 썼다기보단 쏟아냈다. 목에서 꺼낸 것이 아니라, 손바닥 굳은살에서 문장이 튀어나왔다. 한국의 노동 문학은 문학사의 변두리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노동 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고약하게 들렸다. 너무 직설적이고, 너무 투쟁적이고, 너무 불편하니까. 하지만 그 불편함이 바로 시작이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그 불편함은 현실의 증언이 되었다. 증언은 곧 문학이 되었고, 문학은 이데올로기의 첨병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문학은 이념을 넘어섰고, 그것은 가장 눈부신 순간이었다.2. 노동 문학의 첫 목소리1970년.. 2025. 6. 20. 조신한 문장을 박차고 나온 그녀들: 페미니즘과 문학 1. 페미니즘과 문학한국의 페미니즘 문학은 사실 아주 오래된, 아주 느린, 아주 끈질긴 이야기다. 오래전,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단어를 땅속 깊이 묻어두었을 때에도 그녀는 자라고 있었다. 흙 속에서. 달팽이처럼 느리게. 혹은 뿌리처럼 조용히.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이자 시집을 출판했던 김명순은「동경」이나「옛날의 노래여」 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5개 국어에 능통하고 음악적 재능까지 갖춘 여러모로 다재다능한 작가였지만, 지독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희생되고 말았다. 김명순은 한국 최초의 여성 문인이자 페미니스트 작가로 평가된다. 그 후 많은 여성 작가들이 등장했다. 박완서는「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통해 가족사 속 여성의 상처와 억압을 섬세하게 그려냈고, 오정희는「유년의 뜰」 전쟁으로 .. 2025. 6. 19. 상처와 기억의 문학사: 한국 전쟁 문학 1. 한국 사회와 전쟁 문학전쟁은 총알만 남기지 않는다. 부스럭거리는 침묵도 남긴다. 책 속에 낀 마른 은행잎처럼,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안은 누렇게 무너져 있다. 한국의 전쟁 문학은 그런 침묵을 종이에 꾹꾹 눌러 새긴 것이다. 피로 쓴 건 아니지만, 피냄새가 난다. 김동리의 〈무녀도〉에서 흔들리는 굿판의 북소리는 총성보다 더 크다. 황순원의 는 낭만의 대명사처럼 불리지만, 그건 전쟁 이전의 소중함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경고장이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다, 너도 예외는 아니다’라는 말.2. 한국 전쟁 문학의 태동: 쏟아진 탄환, 쏟아진 문장전쟁은 1950년에 시작됐지만, 문학은 그보다 빠르거나 느리게 반응했다. 누군가는 탱크가 지나간 자리에서 시를 썼고, 누군가는 .. 2025. 6. 18. 한국 호러 문학, 그 소름 돋는 아름다움 1. 한국 호러 문학 갑자기 문이 삐걱, 열린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이게 호러다. 설명하려 하면 사라지고, 모른 척하면 따라온다. 한국 호러 문학은 그렇게 등줄기를 타고 오르며, 뒷목을 간질이는 이야기다. 시작은 늘 조용하지만 끝은 언제나… “어?” 하고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그렇다면 호러라는 장르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우리가 귀신 얘기를 무서워한 게 언제부터일까? 이제부터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바로 “한(恨)”의 역사이다. 2. 공포의 뿌리한국 호러 문학의 첫 자락은 구비문학, 그러니까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들에서 시작되었다. “전설”이라는 단어가 가장 가깝다. 대표적으로는 같은 이야기. 계모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자매의 귀신이 복수를 한다. 그냥 무서운 게 아니라 억울함, 슬픔.. 2025. 6. 17. 한국에서의 SF와 판타지 문학 1. 한국에서 SF와 판타지가 자라는 방법"정말로, 그게 말이 돼요?"라는 질문을 견디는 이야기들로부터.어느 날 낮잠을 자다 꿈을 꿨다. 달 항아리를 타고 화성으로 이민 가는 꿈이었다. 조선 백자 위에 앉아, 누군가는 우주복을 입고 고추장을 바르고 있었고, 어떤 이는 텔레파시로 을 번역하고 있었다. 웃기지 않은가? 그런데 그 웃긴 게 한국 SF와 판타지의 시작점일 수 있다. ‘진지하게 상상한다’는 건 원래 이상한 일이니까.그러니까, SF는 Science Fiction, 과학 소설이다. 그런데 꼭 과학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테드 창이라는 미국 작가는 말한다. “SF는 과학보다 인간을 탐험한다”라고. 우리는 그걸 이미 알고 있다. 옛날 에도 우주선은 없었지만, 바다와 하늘을 넘는 판타지가 있었으니 말이.. 2025. 6. 16. 김유정에서 황정은까지: 한국 단편 소설 1. 한국 단편소설한국 단편소설은 작은 방 하나다. 무릎 꿇고 들어가야 하고, 허리를 펴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힌다. 하지만 그 방 안에는 세상보다 더 큰 우주가 들어 있다. 김유정의 웃음소리가 벽에 스며 있고, 황정은의 침묵이 바닥을 덮는다. 이야기들은 그 사이를 걷는다. 삐걱, 삐걱, 문이 열리고 닫힌다. 누군가는 밥 짓는 냄새를 따라오고, 누군가는 그냥 조용히 앉아 눈을 감는다.1. 김유정의 '웃픈'김유정은 한국 단편소설의 ‘웃픈’ 아버지쯤 된다. , , 같은 작품은 입을 벌려 웃게 만들지만, 웃음 뒤에는 항상 이상한 가슴 먹먹함이 남는다. 그건 뭘까. 소리 내어 웃다가, “근데 이게 왜 웃기지?” 하고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그 순간 말이다. 문학이론가 김윤식은 이를 ‘해학적 리얼리즘’이라 불렀다... 2025. 6. 15. 이전 1 2 3 4 ··· 2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