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84 세계는 잡음 속에서 온다: 단파(SW, Shortwave) 라디오 1. 단파 (SW, Shortwave) 라디오낡았지만 기능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품게 되는 물건. 단파라디오는 그런 물건이다.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지만, 한때 우리는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전파 속에서 세계를 들었다. 단파라디오는 그 공기 속의 길, 먼 곳에서 날아온 목소리들이 좁은 금속 통 속으로 모여드는 기묘한 통로였다. 단파라는 말은 ‘파장이 짧은 전파’라는 뜻이다. 파장은 물결 하나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의 길이를 말하는데, 이 길이가 짧을수록 더 높은 주파수를 갖는다. 그런데 짧은 파장은 특이한 성질이 있다. 지구 대기권의 전리층에 부딪히면 반사된다. 마치 너무 잘 튕겨 올라가는 농구공처럼, 전리층은 단파를 다시 지구 쪽으로 내려보.. 2025. 12. 12. 사물은 왜 거기에 있는가, 라는 오래된 질문: 형이상학(Metaphysics) 1. 형이상학 (Metaphysics) 언젠가 늦은 오후, 서가 앞에서 낡은 책을 꺼내 들었던 적이 있다. 책장은 약간 휘어 있었고, 종이는 햇빛에 바래 있었다. 그런데 그 물건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 그 단순한 존재감이 이상하게 마음을 끌었다. ‘왜 이 책은 이 자리에, 이 순간, 이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불쑥 들어왔다. 형이상학은 바로 이런 순간에 시작된다. 보이는 것 너머를 향해 시선을 조금 옆으로 기울이는 행동. 사물에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는 아이의 놀라움처럼. 고대 철학자들은 이 세계의 바깥, 그보다 한 층 깊은 자리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했다. 눈앞의 물건들, 사건들, 감정들 뒤편에서 조용히 흐르는 원리를 찾고 싶어 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의 배.. 2025. 12. 10.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에 관하여: gender performativity 1.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에 관하여아침에 거울을 본다. 누구에게 보여줄 얼굴인지 생각한다. 직장에 갈 때와 연인을 만날 때, 친한 친구와 술자리로 향할 때. 표정이 다르고, 몸짓이 다르다. 내가 선택하는 옷 하나 말투 하나에도 내가 어떤 사람이길 원하는지가 스며 있다. 우리는 그걸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주디스 버틀러는 묻는다. 정말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우리가 반복해서 ‘연기해 온’ 것일 뿐인가? 버틀러는 ‘젠더는 수행(performance)된다’고 말했다. 무대 위 배우처럼 우리는 매일 ‘여성다움’이나 ‘남성다움’을 연기한다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본래 우리 속에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사회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길 바라는지를 보여주었고, 우리는 그.. 2025. 12. 8.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performativity)에 대하여 1. 주디스버틀러 (Judith P. Butler)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년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난 유대계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 어린 시절부터 질문이 많았다고 한다. 예컨대, 왜 어떤 사람은 '정상’이라 불리고 누군가는 ‘이상’이라 불리는지. 그 질문은 성장하면서 더 깊어졌고, 결국 철학과 윤리학, 정신분석 이론, 페미니즘, 구조주의를 넘나들며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행되는 것이다’**라는 개념에 다다른다. 버틀러는 단지 학자가 아니다. 정치적 투사,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 그리고 여러 갈등 속에서도 “누군가가 배제될 때 철학은 존재 의미를 잃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영향받은 사상가로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이 있다. 그녀의 대표.. 2025. 12. 4. 〈어떤 색도 아닌 색에 대하여 – 현대 미술 속 모노크롬을 걷다〉 1. 모노크롬 (mono-chrome)어쩌면 색이라는 것은 눈을 감았을 때 더 뚜렷해질지도 모른다. 어두움 속에서 한 차례 시야가 비워진 후, 눈꺼풀 너머 잔광처럼 맴도는 감정의 빛. 나는 그 순간을 생각한다. 바넷 뉴먼의 거대한 붉은 화면 앞에 섰을 때도, 로스코의 뭉개진 자주색을 마주했을 때도, 혹은 집에서 조용히 휴대폰 화면 속 흰 바탕을 바라보다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을 때도. 색은 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수행한다. 2. 모노크롬, 하나의 색이 아닌 세계의 방식모노크롬(mono-chrome). 직역하면 “하나의 색”이지만, 사실 이 말은 하나의 색으로 모든 것을 말해보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마치 하루 종일 회색 하늘 아래를 걸을 때, 기온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공기가 어떤 말로도 포착되지 않는.. 2025. 12. 2. 잊히는 것들의 강가에 서서: 레테(Lethe) 1. 레테-Lethe잊어버린다는 것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걸까? 때때로 나는 어떤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손가락 끝에서 맴도는 느낌을 받곤 한다. 눈앞까지 떠올랐던 장면이 갑자기 흐려지고, 훅 꺼져버린 촛불처럼 기억이 탄 흔적만 남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묘한 안도감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잊는다는 것은 마치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천천히 떠밀려가는 조용한 강물과도 같다. 이 잊힘의 강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레테(Lethe)"라고 불렀다. 죽은 이들이 저승으로 향할 때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 물을 마시면 생전의 모든 기억을 잊고 새로운 영혼으로 태어나게 되는 장소. 그러나 나는 레테를 단순히 신화 속 강의 이름으로만 남겨두기보다 우리의 일상 깊숙이 배어 있는 조용한 망각의 흐름으로 바라보고 싶다.. 2025. 11. 26. 이전 1 2 3 4 ··· 3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