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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SF와 판타지 문학 1. 한국에서 SF와 판타지가 자라는 방법"정말로, 그게 말이 돼요?"라는 질문을 견디는 이야기들로부터.어느 날 낮잠을 자다 꿈을 꿨다. 달 항아리를 타고 화성으로 이민 가는 꿈이었다. 조선 백자 위에 앉아, 누군가는 우주복을 입고 고추장을 바르고 있었고, 어떤 이는 텔레파시로 을 번역하고 있었다. 웃기지 않은가? 그런데 그 웃긴 게 한국 SF와 판타지의 시작점일 수 있다. ‘진지하게 상상한다’는 건 원래 이상한 일이니까.그러니까, SF는 Science Fiction, 과학 소설이다. 그런데 꼭 과학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테드 창이라는 미국 작가는 말한다. “SF는 과학보다 인간을 탐험한다”라고. 우리는 그걸 이미 알고 있다. 옛날 에도 우주선은 없었지만, 바다와 하늘을 넘는 판타지가 있었으니 말이.. 2025. 6. 16.
김유정에서 황정은까지: 한국 단편 소설 1. 한국 단편소설한국 단편소설은 작은 방 하나다. 무릎 꿇고 들어가야 하고, 허리를 펴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힌다. 하지만 그 방 안에는 세상보다 더 큰 우주가 들어 있다. 김유정의 웃음소리가 벽에 스며 있고, 황정은의 침묵이 바닥을 덮는다. 이야기들은 그 사이를 걷는다. 삐걱, 삐걱, 문이 열리고 닫힌다. 누군가는 밥 짓는 냄새를 따라오고, 누군가는 그냥 조용히 앉아 눈을 감는다.1. 김유정의 '웃픈'김유정은 한국 단편소설의 ‘웃픈’ 아버지쯤 된다. , , 같은 작품은 입을 벌려 웃게 만들지만, 웃음 뒤에는 항상 이상한 가슴 먹먹함이 남는다. 그건 뭘까. 소리 내어 웃다가, “근데 이게 왜 웃기지?” 하고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그 순간 말이다. 문학이론가 김윤식은 이를 ‘해학적 리얼리즘’이라 불렀다... 2025. 6. 15.
입이 말하는 서사: 판소리와 구비문학 1. 판소리와 구비문학어릴 적, 어느 날 저녁이었다. TV는 꺼졌고, 벽지는 구겨졌고, 바람은 찬데 라면은 끓고 있었다. 할머니는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입을 열었다. “옛날에 말이여…” 그때 나는 알았다. 문학은 종이에만 적히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종종 잊는다. 문학이란 활자 이전에 소리였고, 몸짓이었고, 숨결이었다는 걸. 학자 김열규 선생은 이런 구비 문학, 즉 말로 전해지는 문학을 연구하며 한국인의 이야기 본능을 “살아 있는 것들의 기록”이라 했다. ‘구비’(口碑)는 말 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다. 입구(口) 자에 비석 비(碑), 말하자면 말로 새겨지는 무형의 비석이다.도깨비가 뛰어다니고, 호랑이가 말을 하고, 신랑을 삼킨 구렁이가 몸을 뒤집는다. 이건 그냥 웃긴 이야기가 .. 2025. 6. 13.
"시는 왜 갑자기 줄을 바꿀까?" - 한국 현대시의 기법과 형식 실험 1. 한국 현대시의 기법과 형식 실험에 대하여종이에 잉크가 ‘또르르’ 굴러가던 시대가 있었다. 시를 쓰는 일은 물 위에 뜨는 나뭇잎처럼,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형식은 정해져 있었고, 감정은 그 안에서 찰랑거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시가 틀을 부수기 시작했다. 한 줄이 짧아지고, 단어가 튀어나오고, 문법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시가 마치 슬리퍼를 질질 끌고 골목을 도는 아이처럼 제멋대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2. 형식을 부수다한국 현대시의 가장 큰 특징은 형식 실험이다. 이 실험은 단순히 ‘시를 다르게 써보자’는 취향이 아니다. 삶이 달라졌고, 언어가 달라졌기 때문에 시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예전엔 4 음보, 7 음보 같은 리듬에 맞춰 시를 썼다. 이건 음악처럼 일정한 박자를 가진 시라고 보면 된다.하지.. 2025. 6. 12.
조용한 문장의 역사 - 한문학 다시 읽기 1. 한문학, 말을 넘는 글의 세계먼지 낀 책장이 사르륵, 소리 내며 열린다. 검고 고요한 먹빛이 바람처럼 스며드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문장을 오늘처럼 읽는다. 한문학은 ‘한자로 쓰인 문학’이다. 말은 한국어인데, 글은 중국의 문자를 썼다. 이 모순처럼 들리는 조합 속에 한국 사람들의 고집스러운 감정과 생각이 오롯이 담겨 있다. 붓을 들고, 마음을 다듬어 문장을 짓던 이들의 세계는 마치 고요한 연못에 돌 하나를 툭, 던지는 느낌이었다. 파문이 넓게, 천천히 퍼진다. 이런 문학 형식은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꽃을 피웠다. 산문으로는 기, 서, 표, 전 같은 형식이 있고, 운문으로는 시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율시(律詩)라는 형식은 여덟 줄로 이루어진 정갈한 시였고, 고시(古詩)는 좀 더 자유로운 형식.. 2025. 6. 11.
"조선의 노래" - 고전 시가의 형식과 얼굴들 1. 한국 고전 시가의 형식과 주제가끔은 너무 길게 말하지 않는 것이 진심일 때가 있다. 한국 고전 시가는, 그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에 닿았다. 조용한 밤, 모닥불처럼 타오르는 말들. 화려하지 않아 더 오래 남는 문장들.시조, 삼장 구조의 정갈한 그릇과 같다. 한국 고전 시가에서 가장 대표적인 형식은 시조다. 시조는 세 줄로 이루어진 시. 각 줄은 다시 네 마디쯤으로 나뉘며, 전체 3장 구조다. 초장–중장–종장, 이름만 들어도 작은 흐름이 느껴진다. 초장은 상황을 열고, 중장은 감정을 키우고, 종장은 마무리. 마치 누군가의 고백을 조용히 듣고 있는 기분이다. 예를 들면, 황진이의 시조 중 하나는 이렇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강산하니 쉬어 간들 어.. 2025.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