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단편소설
한국 단편소설은 작은 방 하나다. 무릎 꿇고 들어가야 하고, 허리를 펴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힌다. 하지만 그 방 안에는 세상보다 더 큰 우주가 들어 있다. 김유정의 웃음소리가 벽에 스며 있고, 황정은의 침묵이 바닥을 덮는다. 이야기들은 그 사이를 걷는다. 삐걱, 삐걱, 문이 열리고 닫힌다. 누군가는 밥 짓는 냄새를 따라오고, 누군가는 그냥 조용히 앉아 눈을 감는다.
1. 김유정의 '웃픈'
김유정은 한국 단편소설의 ‘웃픈’ 아버지쯤 된다. <동백꽃>, <산골 나그네>, <봄·봄> 같은 작품은 입을 벌려 웃게 만들지만, 웃음 뒤에는 항상 이상한 가슴 먹먹함이 남는다. 그건 뭘까. 소리 내어 웃다가, “근데 이게 왜 웃기지?” 하고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그 순간 말이다.
문학이론가 김윤식은 이를 ‘해학적 리얼리즘’이라 불렀다. 쉽게 말해, 세상의 아픔을 웃음으로 감싸는 방법이다. 웃음은 무기였고, 때론 항복이었다. 김유정의 인물들은 대체로 가난하다. 무지하고 순박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한다. 뚝딱, 뚝딱, 현실이라는 무서운 기계 안에서도 톱니바퀴 하나처럼 굴러간다.
2. 오정희, 박완서의 단단한 목소리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같은 작품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냄새가 있고, 빛깔이 있고, 차마 말하지 못한 말들이 있다.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배경처럼 깔려 있고, 그 속에서 한 여인이 조용히 손을 움켜쥔다. 오정희는 “결핍이 문학의 씨앗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단편은 언제나 무언가가 빠져 있다. 한 사람, 한 순간, 한 말. 박완서 역시 일상 속의 폭력과 권력, 여성의 무력감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문장이 조용한 호수처럼 번져나가고, 마지막엔 조용한 물수제비처럼 감정을 튕긴다.
3. 도시의 소리와 잔해들: 윤흥길, 조세희, 그리고 1980년대의 파편
시간이 지나며 한국 단편은 시골 마당을 떠나 도시 공터로 옮겨간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도시의 삐걱거리는 톱니바퀴 소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시기의 소설은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의 기차에 올라탔다.
이론적으로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에 기대어 있었지만, 쉽게 말하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굴뚝, 지게차, 방직공장, 껌 파는 아이. 배경이 아니라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 단편, 작은 이야기들은 작기에 쉽게 삼켜버릴 수 있었지만 삼키고 나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이게 문학이지.”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
4. 서늘하고 이상한 오늘의 목소리: 김애란, 황정은, 김숨
김애란의 <노크하지 않는 집>, 황정은의 <웃는 남자>, 김숨의 <뿌리 이야기>. 이들의 글은 마치 새벽의 기차 소리 같다. 멀리서 들려오지만, 계속 머릿속을 울린다. 이들은 기존의 서사 구조를 비틀고 부순다. 플롯이 단선적이지 않고, 시간은 뒤섞이며, 목소리는 겹친다. 특히 황정은은 “언어의 여백을 쓰는 작가”로 불린다. 사운드 없이 재생되는 영상처럼, 그녀의 문장은 이미지로 말하고 공기로 호흡한다.
이런 형식 실험은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줄거리를 해체하고, ‘이야기’보다는 ‘언어’를 중심에 놓는 방식. 이론적으로는 리오타르나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의 영향이 있었지만, 실은 아주 직관적인 감각이었다. 다들 알고 있었다. 세계는 더 이상 단순하지 않다는 걸.
5. 그래서, 단편소설은 어디에 있는가
단편은 한 입 크기의 세계다. 그리고 그 세계는 매번 다르다. 때로는 김유정의 고샅에서, 때로는 황정은의 무표정한 도시 속에서, 때로는 김애란의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웃고 울고 숨을 쉰다.
“이야기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커트 보니것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이야기엔 등장인물과 갈등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는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다. 한국 단편소설도 결국 사람 이야기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이야기. 휭, 바람 부는 소리 속에서 누군가 손을 흔든다. “여기 있어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