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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말하는 서사: 판소리와 구비문학 1. 판소리와 구비문학어릴 적, 어느 날 저녁이었다. TV는 꺼졌고, 벽지는 구겨졌고, 바람은 찬데 라면은 끓고 있었다. 할머니는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입을 열었다. “옛날에 말이여…” 그때 나는 알았다. 문학은 종이에만 적히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종종 잊는다. 문학이란 활자 이전에 소리였고, 몸짓이었고, 숨결이었다는 걸. 학자 김열규 선생은 이런 구비 문학, 즉 말로 전해지는 문학을 연구하며 한국인의 이야기 본능을 “살아 있는 것들의 기록”이라 했다. ‘구비’(口碑)는 말 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다. 입구(口) 자에 비석 비(碑), 말하자면 말로 새겨지는 무형의 비석이다.도깨비가 뛰어다니고, 호랑이가 말을 하고, 신랑을 삼킨 구렁이가 몸을 뒤집는다. 이건 그냥 웃긴 이야기가 .. 2025. 6. 13.
"시는 왜 갑자기 줄을 바꿀까?" - 한국 현대시의 기법과 형식 실험 1. 한국 현대시의 기법과 형식 실험에 대하여종이에 잉크가 ‘또르르’ 굴러가던 시대가 있었다. 시를 쓰는 일은 물 위에 뜨는 나뭇잎처럼,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형식은 정해져 있었고, 감정은 그 안에서 찰랑거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시가 틀을 부수기 시작했다. 한 줄이 짧아지고, 단어가 튀어나오고, 문법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시가 마치 슬리퍼를 질질 끌고 골목을 도는 아이처럼 제멋대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2. 형식을 부수다한국 현대시의 가장 큰 특징은 형식 실험이다. 이 실험은 단순히 ‘시를 다르게 써보자’는 취향이 아니다. 삶이 달라졌고, 언어가 달라졌기 때문에 시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예전엔 4 음보, 7 음보 같은 리듬에 맞춰 시를 썼다. 이건 음악처럼 일정한 박자를 가진 시라고 보면 된다.하지.. 2025. 6. 12.
조용한 문장의 역사 - 한문학 다시 읽기 1. 한문학, 말을 넘는 글의 세계먼지 낀 책장이 사르륵, 소리 내며 열린다. 검고 고요한 먹빛이 바람처럼 스며드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문장을 오늘처럼 읽는다. 한문학은 ‘한자로 쓰인 문학’이다. 말은 한국어인데, 글은 중국의 문자를 썼다. 이 모순처럼 들리는 조합 속에 한국 사람들의 고집스러운 감정과 생각이 오롯이 담겨 있다. 붓을 들고, 마음을 다듬어 문장을 짓던 이들의 세계는 마치 고요한 연못에 돌 하나를 툭, 던지는 느낌이었다. 파문이 넓게, 천천히 퍼진다. 이런 문학 형식은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꽃을 피웠다. 산문으로는 기, 서, 표, 전 같은 형식이 있고, 운문으로는 시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율시(律詩)라는 형식은 여덟 줄로 이루어진 정갈한 시였고, 고시(古詩)는 좀 더 자유로운 형식.. 2025. 6. 11.
"조선의 노래" - 고전 시가의 형식과 얼굴들 1. 한국 고전 시가의 형식과 주제가끔은 너무 길게 말하지 않는 것이 진심일 때가 있다. 한국 고전 시가는, 그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에 닿았다. 조용한 밤, 모닥불처럼 타오르는 말들. 화려하지 않아 더 오래 남는 문장들.시조, 삼장 구조의 정갈한 그릇과 같다. 한국 고전 시가에서 가장 대표적인 형식은 시조다. 시조는 세 줄로 이루어진 시. 각 줄은 다시 네 마디쯤으로 나뉘며, 전체 3장 구조다. 초장–중장–종장, 이름만 들어도 작은 흐름이 느껴진다. 초장은 상황을 열고, 중장은 감정을 키우고, 종장은 마무리. 마치 누군가의 고백을 조용히 듣고 있는 기분이다. 예를 들면, 황진이의 시조 중 하나는 이렇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강산하니 쉬어 간들 어.. 2025. 6. 10.
스마트폰 속 문학: 웹소설과 웹툰의 반란 1. 웹이라는 새로운 땅전철을 타면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사람들이 보인다. 종이책이 아니라, 손바닥 안의 세상에 빠져 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고, 또 누군가는 엄지를 빠르게 튕기며 다음 장면을 향해 간다. 그 속에 있는 건 글자나 그림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종이로 된 책이 아니다. 한국 문학은 이제 웹이라는 새로운 땅 위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야기의 물길을 바꾼 기술은 ‘디지털 전환’ 혹은 ‘미디어 전환(media convergence)’이라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이 개념은 미국의 미디어학자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가 처음 본격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서로 다른 콘텐츠들이 디지털 환경에서 융합되고, 독자와 사용자들의 참여가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쉽게 말해, 이야기.. 2025. 6. 9.
실존과 리얼리즘이 마주친 자리: <광장>과 <태백산맥> 1. 전후 문학한국 전쟁(1950~1953)은 총칼만 오고 간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도, 생각도 둘로 쪼개졌다. 그걸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란 쉽게 말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다.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남이냐, 북이냐. 사람이 사람을 찢어놓던 그 틈에서 작가들은 펜을 들었다. 그들이 만든 문학을 “전후 문학”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전쟁 이후의 문학이다.2. 최인훈의 『광장』(1960)은 최인훈의 데뷔작이자 한국 현대문학의 전환점이다.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남쪽의 자유에도, 북쪽의 평등에도 숨이 막힌다. 그래서 둘 다 아닌 제3국을 택하지만, 결국 바다에 몸을 던진다. 이 책의 제목인 ‘광장’은 사회적 소통의 공간이다.그러나 .. 2025. 6.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