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말하는 서사: 판소리와 구비문학
1. 판소리와 구비문학어릴 적, 어느 날 저녁이었다. TV는 꺼졌고, 벽지는 구겨졌고, 바람은 찬데 라면은 끓고 있었다. 할머니는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입을 열었다. “옛날에 말이여…” 그때 나는 알았다. 문학은 종이에만 적히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종종 잊는다. 문학이란 활자 이전에 소리였고, 몸짓이었고, 숨결이었다는 걸. 학자 김열규 선생은 이런 구비 문학, 즉 말로 전해지는 문학을 연구하며 한국인의 이야기 본능을 “살아 있는 것들의 기록”이라 했다. ‘구비’(口碑)는 말 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다. 입구(口) 자에 비석 비(碑), 말하자면 말로 새겨지는 무형의 비석이다.도깨비가 뛰어다니고, 호랑이가 말을 하고, 신랑을 삼킨 구렁이가 몸을 뒤집는다. 이건 그냥 웃긴 이야기가 ..
2025. 6. 13.
조용한 문장의 역사 - 한문학 다시 읽기
1. 한문학, 말을 넘는 글의 세계먼지 낀 책장이 사르륵, 소리 내며 열린다. 검고 고요한 먹빛이 바람처럼 스며드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문장을 오늘처럼 읽는다. 한문학은 ‘한자로 쓰인 문학’이다. 말은 한국어인데, 글은 중국의 문자를 썼다. 이 모순처럼 들리는 조합 속에 한국 사람들의 고집스러운 감정과 생각이 오롯이 담겨 있다. 붓을 들고, 마음을 다듬어 문장을 짓던 이들의 세계는 마치 고요한 연못에 돌 하나를 툭, 던지는 느낌이었다. 파문이 넓게, 천천히 퍼진다. 이런 문학 형식은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꽃을 피웠다. 산문으로는 기, 서, 표, 전 같은 형식이 있고, 운문으로는 시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율시(律詩)라는 형식은 여덟 줄로 이루어진 정갈한 시였고, 고시(古詩)는 좀 더 자유로운 형식..
2025.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