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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빼앗긴 문장들: 식민지 시대 문학 1. 한국 문학의 시작점식민지 시절, 우리에게서 가장 먼저 사라졌던 건, 말이었다. 그 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한국 문학은 시작됐다. 잃어버린 말들을 찾아 쓰는 것. 그게 이 땅의 문학이 처음 배운 문장 쓰기였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였다. 이 시기, 사람들은 두 가지를 잃었다. 나라와 언어. 그리고 문학은 그중에서도 말에 대해 가장 깊이 반응했다. 식민지 정부는 학교에서 조선어를 금지하고 일본어를 강요했다. 신문과 잡지,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시장에서조차 “조선말 쓰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붙었다. 그런 상황에서 작가들이 할 수 있었던 건, 우리말을 지키는 것, 우리말의 자리를 되찾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문장은 종종 숨이 찼다. 급히 써 내려간 듯, 자꾸 숨을 고르듯.. 2025. 6. 26.
문학이 계급을 말하는 방식: 보여주기 1. 문학과 계급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또렷하진 않다. 처음엔 한국 문학에서 계급 이야기를 해보자고 생각했는데, 말하다 보니 자꾸 어떤 기억들이 맴돈다. 가령, 국민학교 4학년쯤 됐을 때, 운동화가 다 해져서 새 걸 사달라고 했더니 엄마가 말했다. ‘비 오는 날만 발 안 젖으면 되잖아.’ 그 말을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날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지만, 이상하게 발끝이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가난이었다. 계급이라는 단어보다 먼저 배운 감각이었다. 문학에서도 그랬다. 직접적으로 계급이란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용어가 아닌 느낌으로 나는 계급을 알아챘다.2. '난장이'의 계급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처음 읽었을 땐 그저 특이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2025. 6. 25.
콘크리트와 흙 사이의 문장들: 한국 문학 속 농촌과 도시 1. 한국 문학 속 도시와 농촌도시는 언제나 번쩍, 번쩍. 빛이 난다. 농촌은 언제나 소리를 낸다. 바스락, 꼬끼오, 후드득. 이 두 세계는, 마치 같은 드라마에서 다른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는 장면들 같다. 똑같은 한국 땅 위에 있지만, 도시와 농촌은 자주, 너무 자주 문학 안에서 충돌했다. 충돌하면서도, 끝내 서로를 잊지 못했다.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써 내려온 한 편의 사랑 이야기이자 이별 이야기다. 2. 도시와 농촌의 갈등문학에서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1920~1930년대 이광수, 염상섭, 현진건의 소설에서부터 이 대립은 무겁고도 조용히 등장했다. 염상섭의 『만세전』에서는 도시 문명에 대한 환멸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는 도시 빈민의 피로가 축축하게 흐른다. 도시란 쉽게.. 2025. 6. 23.
한국 문학 속 가족: 밥상 위의 침묵 1. 한국 문학 속 가족가족은 왜 그렇게 말이 없었을까 아니, 말을 하긴 했다. 다만 그 말은 침묵보다 더 뾰족했다. 꾹꾹 눌러썼다가 찢어버린 편지 같았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그런 편지 중 하나다. 엄마는 늘 무언가를 참았고, 딸은 늘 무언가를 알아버렸다. 부엌에서 들리는 국 끓는 소리, 종이장 넘기는 소리, 옆방에서 누가 문지방을 밟는 소리. 이런 것들이 문학이 되었다. 박완서는 ‘분단 가족’이라는 틀에서, 실은 여성과 엄마로서의 자기 존재를 질문했다. 페미니즘 비평가 정희진은 이것을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 부른다. 가족은 제도였고, 제도는 폭력이었고, 폭력은 일상이었다. 그렇게 밥상 위 국물처럼 가족은 흘렀고, 말라붙었고, 다시 덮였다. 2. 산업화와 가족70.. 2025. 6. 22.
기계와 펜 사이의 투쟁: 노동 문학의 계보 1. 한국의 노동 문학거기 있었다. 철컥거리는 컨베이어 벨트 소리와, 끼익 끼익 멈칫거리는 기계음 사이에서 누군가는 시를 썼다. 누군가는 소설을 썼다. 누군가는 썼다기보단 쏟아냈다. 목에서 꺼낸 것이 아니라, 손바닥 굳은살에서 문장이 튀어나왔다. 한국의 노동 문학은 문학사의 변두리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노동 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고약하게 들렸다. 너무 직설적이고, 너무 투쟁적이고, 너무 불편하니까. 하지만 그 불편함이 바로 시작이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그 불편함은 현실의 증언이 되었다. 증언은 곧 문학이 되었고, 문학은 이데올로기의 첨병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문학은 이념을 넘어섰고, 그것은 가장 눈부신 순간이었다.2. 노동 문학의 첫 목소리1970년.. 2025. 6. 20.
조신한 문장을 박차고 나온 그녀들: 페미니즘과 문학 1. 페미니즘과 문학한국의 페미니즘 문학은 사실 아주 오래된, 아주 느린, 아주 끈질긴 이야기다. 오래전,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단어를 땅속 깊이 묻어두었을 때에도 그녀는 자라고 있었다. 흙 속에서. 달팽이처럼 느리게. 혹은 뿌리처럼 조용히.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이자 시집을 출판했던 김명순은「동경」이나「옛날의 노래여」 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5개 국어에 능통하고 음악적 재능까지 갖춘 여러모로 다재다능한 작가였지만, 지독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희생되고 말았다. 김명순은 한국 최초의 여성 문인이자 페미니스트 작가로 평가된다. 그 후 많은 여성 작가들이 등장했다. 박완서는「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통해 가족사 속 여성의 상처와 억압을 섬세하게 그려냈고, 오정희는「유년의 뜰」 전쟁으로 .. 2025.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