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84 기억의 강 위에 서 있는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 1. 므네모시네 (Mnemosyne)므네모시네는 그리스 신화에서 ‘기억을 맡은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기억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억을 ‘건네주고’, ‘보호하고’, 때로는 ‘숨겨두는’ 존재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웅덩이처럼, 때로는 연못, 때로는 호수처럼 우리를 비추는 물결을 만드는 여신이다.2. 기억은 늘 물결처럼 돌아온다나는 종종 기억을 바다 위의 조용한 파도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먼 곳에서 출발해 아주 느리게 다가오고, 때로는 우리가 눈치채기도 전에 발목을 적시며 지나가버린다. 그리고 이 물결을 지켜보는 존재가 바로 므네모시네이다. 우리가 기억을 떠올리는 방식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물건을 잃어버린 날의 걷잡을 수 없는 초조함, 첫사랑의 목소리처럼 흐릿해져도 잊히지 않는 .. 2025. 11. 24. 공기가 폭발할 때: 소리의 벽(Sound Barrier) 1. 소리의 벽 (Sound Barrier)오래된 골목을 지나갈 때 누구나 한 번쯤은 공기 속에 숨어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장벽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처음 그 감각을 떠올린 건 내가 뱉은 숨에 한겨울 버스 창문이 뿌옇게 흐려지던 어느 저녁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거리는 축축한 바람만이 얼음처럼 흘렀다. 그때 나는 알았다. 공기는 항상 우리 주변에 있으면서도, 때로는 우리를 가로막는 벽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소리의 벽(Sound Barrier)’이라는 표현은 원래 과학의 언어다. 물체가 음속 그러니까 약 초속 340미터쯤 되는 속도를 돌파할 때 공기가 들고 일으키는 반발의 장벽.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을 들이받는 것처럼 흔들리고, 저항이 폭발하고, 뒤이어 ‘쾅’ 하는 음속폭.. 2025. 11. 21. 오류가 예술이 되는 순간: 글리치(glitch) 1. 글리치 (glitch)살다 보면 하루가 이상할 때가 있다. 평소처럼 커피를 내리는데 갑자기 커피머신이 한 박자 늦게 숨을 쉰다든가,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늘 뛰어올라 앉던 의자를 멀찍이 바라보기만 한다든가. 아주 작은 틈새 같은 순간들 말이다.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는 빈틈 같으면서도 불길한 느낌이 드는 이상한 하루.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뭔가 한 톱니 어긋난 듯한 기분이 든다. 기계 소리가 조금 늦고, 바람이 조금 다르며, 사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그 순간을 묘사하는 단어가 있다. 우리가 은밀히 두려워하면서도 매혹되는 단어. 바로 글리치(glitch)이다.2. ‘작은 고장’이 드러내는 큰 진실글리치는 원래 기술적 용어다. 기계나 디지털 시스템에서 순간적으로 발.. 2025. 11. 19. 사라지지 않는 것의 법칙: 항등성 1. 항등성어떤 개념들은 처음 들으면 아리송하다. ‘항등성’이라는 말도 그렇다. 하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여 보면 이 단어는 우리 모두가 매일 아주 친밀하게 쓰고 있는 세계의 법칙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있어도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어떤 원칙이다. 평범한 삶에 갑자기 도착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항등성은 그렇게 우리 곁에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2. “아무리 달라 보여도 결국 너는 너다”의 법칙우리가 쓰는 숫자나 문장, 혹은 사물들은 여러 형태로 바뀌어도 여전히 같은 의미를 지닐 때가 있다. 그 ‘의미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 바로 항등성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마트에 가서 우유를 산다고 치자. 우유 팩의 겉모습은 바뀔 수도 있고, 브랜드가 조금씩 달.. 2025. 11. 17. 아주 먼 곳에서 오는 라디오 신호를 잡는 일: DXing(Distant Expedition) 1. DXing (Distant Expedition)어린 시절, 나는 밤마다 작은 단파라디오 앞에 앉았다. 지금은 다들 잊고 지내는 싸구려 플라스틱 라디오는 미세한 잡음을 토해냈다. 그 잡음 속에서 간혹, 세계를 건너오는 목소리들이 들릴 때가 있었다. 영어인지 일본어인지 모를, 혹은 그 어디 중간쯤에 자리한 이상한 리듬의 언어들이 파도처럼 들락거렸다. 나중에서야 그 행위가 바로 DXing—‘Distant Expedition’, 멀리 있는 신호를 찾아 나서는 사소하지만 집요한 원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DXing는 귀의 모험이었다.2. DXing이란 무엇인가: 긴 안테나를 든 탐험가간단히 말해 DXing은 아주 먼 곳에서 오는 라디오 신호를 잡아내는 일이다. 그것은 대륙을 가로질러 넘어오는 .. 2025. 11. 14. 누군가의 말이 내 안에 머물다: 증언적 믿음(testimonial belief) 1. 증언적 믿음(testimonial belief)어느 늦은 오후였다. 전기포트에 물을 데우며, 오래전 엄마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비가 오면 할머니가 무릎이 쑤셨다고 했지.” 그 말은 설명도, 근거도 없이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할머니의 무릎도, 그녀의 통증도 직접 본 적 없지만, 이상하게 그 문장은 오랫동안 ‘사실’처럼 남았다. 철학에서는 이런 식의 믿음을 **증언적 믿음(testimonial belief)**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직접 보거나 경험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말에 의지하여 받아들이는 믿음. 사람은 대부분의 세계를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타인의 말을 통해,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그 말이 스며든 작은 문장들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증언적 믿음은 그래서 불완전하고, .. 2025. 11. 12. 이전 1 2 3 4 5 ··· 3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