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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와 흙 사이의 문장들: 한국 문학 속 농촌과 도시 1. 한국 문학 속 도시와 농촌도시는 언제나 번쩍, 번쩍. 빛이 난다. 농촌은 언제나 소리를 낸다. 바스락, 꼬끼오, 후드득. 이 두 세계는, 마치 같은 드라마에서 다른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는 장면들 같다. 똑같은 한국 땅 위에 있지만, 도시와 농촌은 자주, 너무 자주 문학 안에서 충돌했다. 충돌하면서도, 끝내 서로를 잊지 못했다.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써 내려온 한 편의 사랑 이야기이자 이별 이야기다. 2. 도시와 농촌의 갈등문학에서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1920~1930년대 이광수, 염상섭, 현진건의 소설에서부터 이 대립은 무겁고도 조용히 등장했다. 염상섭의 『만세전』에서는 도시 문명에 대한 환멸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는 도시 빈민의 피로가 축축하게 흐른다. 도시란 쉽게.. 2025. 6. 23.
한국 문학 속 가족: 밥상 위의 침묵 1. 한국 문학 속 가족가족은 왜 그렇게 말이 없었을까 아니, 말을 하긴 했다. 다만 그 말은 침묵보다 더 뾰족했다. 꾹꾹 눌러썼다가 찢어버린 편지 같았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그런 편지 중 하나다. 엄마는 늘 무언가를 참았고, 딸은 늘 무언가를 알아버렸다. 부엌에서 들리는 국 끓는 소리, 종이장 넘기는 소리, 옆방에서 누가 문지방을 밟는 소리. 이런 것들이 문학이 되었다. 박완서는 ‘분단 가족’이라는 틀에서, 실은 여성과 엄마로서의 자기 존재를 질문했다. 페미니즘 비평가 정희진은 이것을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 부른다. 가족은 제도였고, 제도는 폭력이었고, 폭력은 일상이었다. 그렇게 밥상 위 국물처럼 가족은 흘렀고, 말라붙었고, 다시 덮였다. 2. 산업화와 가족70.. 2025. 6. 22.
기계와 펜 사이의 투쟁: 노동 문학의 계보 1. 한국의 노동 문학거기 있었다. 철컥거리는 컨베이어 벨트 소리와, 끼익 끼익 멈칫거리는 기계음 사이에서 누군가는 시를 썼다. 누군가는 소설을 썼다. 누군가는 썼다기보단 쏟아냈다. 목에서 꺼낸 것이 아니라, 손바닥 굳은살에서 문장이 튀어나왔다. 한국의 노동 문학은 문학사의 변두리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노동 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고약하게 들렸다. 너무 직설적이고, 너무 투쟁적이고, 너무 불편하니까. 하지만 그 불편함이 바로 시작이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그 불편함은 현실의 증언이 되었다. 증언은 곧 문학이 되었고, 문학은 이데올로기의 첨병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문학은 이념을 넘어섰고, 그것은 가장 눈부신 순간이었다.2. 노동 문학의 첫 목소리1970년.. 2025. 6. 20.
조신한 문장을 박차고 나온 그녀들: 페미니즘과 문학 1. 페미니즘과 문학한국의 페미니즘 문학은 사실 아주 오래된, 아주 느린, 아주 끈질긴 이야기다. 오래전,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단어를 땅속 깊이 묻어두었을 때에도 그녀는 자라고 있었다. 흙 속에서. 달팽이처럼 느리게. 혹은 뿌리처럼 조용히.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이자 시집을 출판했던 김명순은「동경」이나「옛날의 노래여」 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5개 국어에 능통하고 음악적 재능까지 갖춘 여러모로 다재다능한 작가였지만, 지독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희생되고 말았다. 김명순은 한국 최초의 여성 문인이자 페미니스트 작가로 평가된다. 그 후 많은 여성 작가들이 등장했다. 박완서는「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통해 가족사 속 여성의 상처와 억압을 섬세하게 그려냈고, 오정희는「유년의 뜰」 전쟁으로 .. 2025. 6. 19.
상처와 기억의 문학사: 한국 전쟁 문학 1. 한국 사회와 전쟁 문학전쟁은 총알만 남기지 않는다. 부스럭거리는 침묵도 남긴다. 책 속에 낀 마른 은행잎처럼,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안은 누렇게 무너져 있다. 한국의 전쟁 문학은 그런 침묵을 종이에 꾹꾹 눌러 새긴 것이다. 피로 쓴 건 아니지만, 피냄새가 난다. 김동리의 〈무녀도〉에서 흔들리는 굿판의 북소리는 총성보다 더 크다. 황순원의 는 낭만의 대명사처럼 불리지만, 그건 전쟁 이전의 소중함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경고장이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다, 너도 예외는 아니다’라는 말.2. 한국 전쟁 문학의 태동: 쏟아진 탄환, 쏟아진 문장전쟁은 1950년에 시작됐지만, 문학은 그보다 빠르거나 느리게 반응했다. 누군가는 탱크가 지나간 자리에서 시를 썼고, 누군가는 .. 2025. 6. 18.
한국 호러 문학, 그 소름 돋는 아름다움 1. 한국 호러 문학 갑자기 문이 삐걱, 열린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이게 호러다. 설명하려 하면 사라지고, 모른 척하면 따라온다. 한국 호러 문학은 그렇게 등줄기를 타고 오르며, 뒷목을 간질이는 이야기다. 시작은 늘 조용하지만 끝은 언제나… “어?” 하고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그렇다면 호러라는 장르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우리가 귀신 얘기를 무서워한 게 언제부터일까? 이제부터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바로 “한(恨)”의 역사이다. 2. 공포의 뿌리한국 호러 문학의 첫 자락은 구비문학, 그러니까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들에서 시작되었다. “전설”이라는 단어가 가장 가깝다. 대표적으로는 같은 이야기. 계모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자매의 귀신이 복수를 한다. 그냥 무서운 게 아니라 억울함, 슬픔.. 2025.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