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에서 SF와 판타지가 자라는 방법
"정말로, 그게 말이 돼요?"라는 질문을 견디는 이야기들로부터.
어느 날 낮잠을 자다 꿈을 꿨다. 달 항아리를 타고 화성으로 이민 가는 꿈이었다. 조선 백자 위에 앉아, 누군가는 우주복을 입고 고추장을 바르고 있었고, 어떤 이는 텔레파시로 <춘향전>을 번역하고 있었다. 웃기지 않은가? 그런데 그 웃긴 게 한국 SF와 판타지의 시작점일 수 있다. ‘진지하게 상상한다’는 건 원래 이상한 일이니까.
그러니까, SF는 Science Fiction, 과학 소설이다. 그런데 꼭 과학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테드 창이라는 미국 작가는 말한다. “SF는 과학보다 인간을 탐험한다”라고. 우리는 그걸 이미 알고 있다. 옛날 <토끼전>에도 우주선은 없었지만, 바다와 하늘을 넘는 판타지가 있었으니 말이다.
2. “그게 진짜야?”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기
SF든 판타지든 핵심은 ‘정말로 있을 수 있는가?’를 묻는 대신,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묻는 것이다. 이건 철학자 칼 포퍼의 “반증 가능성” 이론 하고도 닿아 있다. 즉, 진짜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상상으로 우리가 무엇을 보게 되는지가 중요하다.
한국 문학은 오랫동안 리얼리즘이라는 거대한 강 속에서 헤엄쳐 왔다. 현실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식민지, 전쟁, 산업화, 민주화 운동 등 그 장을 벗어나 공중으로 붕 떠서 말하는 건 ‘도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SF와 판타지는 ‘아이들 장난’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현실이 워낙 엉망이라, 리얼리즘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AI가 그림을 그리고, 기후 위기로 계절이 흔들리고, 모두가 메타버스 속에 또 다른 자신을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는 오히려 지금을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일 수 있다.
3.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작가들
황모과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한국에서도 이렇게 재미있고도 날카로운 SF가 가능하구나, 싶다. 로봇이 등장하지만 로봇보다 사람의 감정이 더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어색하고도 짠한 느낌이다. 본명도 얼굴도 알 수 없는 듀나 작가는 1990년대부터 이미 한국 SF의 중심을 지켜온 존재다. 특히, 『태평양 횡단 특급』은 인상적이다 못해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되리라 장담한다.
판타지 쪽으로 가면『해리 포터』식 마법은 아니지만, 이영도, 전민희, 이우혁 작가가 있다. 김보영 작가의『7인의 집행관』은 마치 “철학적 판타지”를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4. 한국의 판타지
사실 한국에는 판타지가 늘 있었다. 바로 구비문학이다. 옛날 할머니들이 무릎 베고 해 주던 이야기, 귀신이 나오고 호랑이가 말을 하던 그것. SF는 새로운 것 같지만, 이미 설화 속에는 여러 상상력이 존재했다. 학자 김윤식은 한국 소설의 미학은 ‘서사적 이중성’이라고 말했다. 겉으론 현실을 말하면서도, 그 속엔 늘 ‘신화적 상상’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즉, 한국 소설은 사실상 늘 판타지를 해왔던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아닐까.
5. 마치며
SF와 판타지는 한국에서 더 자라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현실을 감당해 왔다. 이제는 다른 식으로 살아보는 게 어떨까? 좀 더 미친 듯이, 좀 더 말도 안 되게, 좀 더 빛나는 존재로.
커트 보니것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해하려고 애쓰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은하계 끝에서도, 두더지 굴 같은 골목에서도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한국 SF와 판타지는, 마치 기계 장치 같은 이야기 뼈대 위에 된장국 냄새나는 정서를 얹은 요리일지도 모른다. 미친 조합이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우리는 모두 어릴 적 드래곤을 만난 적이 있다. 그게 꿈이든, 동화책이든, 밤에 혼자 울던 순간이든. 그러니까 다시 그 드래곤을 꺼낼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한국적 드래곤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모습이던 덜 무섭거나 덜 아름답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