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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기억의 문학사: 한국 전쟁 문학 1. 한국 사회와 전쟁 문학전쟁은 총알만 남기지 않는다. 부스럭거리는 침묵도 남긴다. 책 속에 낀 마른 은행잎처럼,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안은 누렇게 무너져 있다. 한국의 전쟁 문학은 그런 침묵을 종이에 꾹꾹 눌러 새긴 것이다. 피로 쓴 건 아니지만, 피냄새가 난다. 김동리의 〈무녀도〉에서 흔들리는 굿판의 북소리는 총성보다 더 크다. 황순원의 는 낭만의 대명사처럼 불리지만, 그건 전쟁 이전의 소중함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경고장이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다, 너도 예외는 아니다’라는 말.2. 한국 전쟁 문학의 태동: 쏟아진 탄환, 쏟아진 문장전쟁은 1950년에 시작됐지만, 문학은 그보다 빠르거나 느리게 반응했다. 누군가는 탱크가 지나간 자리에서 시를 썼고, 누군가는 .. 2025. 6. 18.
한국 호러 문학, 그 소름 돋는 아름다움 1. 한국 호러 문학 갑자기 문이 삐걱, 열린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이게 호러다. 설명하려 하면 사라지고, 모른 척하면 따라온다. 한국 호러 문학은 그렇게 등줄기를 타고 오르며, 뒷목을 간질이는 이야기다. 시작은 늘 조용하지만 끝은 언제나… “어?” 하고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그렇다면 호러라는 장르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우리가 귀신 얘기를 무서워한 게 언제부터일까? 이제부터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바로 “한(恨)”의 역사이다. 2. 공포의 뿌리한국 호러 문학의 첫 자락은 구비문학, 그러니까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들에서 시작되었다. “전설”이라는 단어가 가장 가깝다. 대표적으로는 같은 이야기. 계모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자매의 귀신이 복수를 한다. 그냥 무서운 게 아니라 억울함, 슬픔.. 2025. 6. 17.
한국에서의 SF와 판타지 문학 1. 한국에서 SF와 판타지가 자라는 방법"정말로, 그게 말이 돼요?"라는 질문을 견디는 이야기들로부터.어느 날 낮잠을 자다 꿈을 꿨다. 달 항아리를 타고 화성으로 이민 가는 꿈이었다. 조선 백자 위에 앉아, 누군가는 우주복을 입고 고추장을 바르고 있었고, 어떤 이는 텔레파시로 을 번역하고 있었다. 웃기지 않은가? 그런데 그 웃긴 게 한국 SF와 판타지의 시작점일 수 있다. ‘진지하게 상상한다’는 건 원래 이상한 일이니까.그러니까, SF는 Science Fiction, 과학 소설이다. 그런데 꼭 과학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테드 창이라는 미국 작가는 말한다. “SF는 과학보다 인간을 탐험한다”라고. 우리는 그걸 이미 알고 있다. 옛날 에도 우주선은 없었지만, 바다와 하늘을 넘는 판타지가 있었으니 말이.. 2025. 6. 16.
김유정에서 황정은까지: 한국 단편 소설 1. 한국 단편소설한국 단편소설은 작은 방 하나다. 무릎 꿇고 들어가야 하고, 허리를 펴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힌다. 하지만 그 방 안에는 세상보다 더 큰 우주가 들어 있다. 김유정의 웃음소리가 벽에 스며 있고, 황정은의 침묵이 바닥을 덮는다. 이야기들은 그 사이를 걷는다. 삐걱, 삐걱, 문이 열리고 닫힌다. 누군가는 밥 짓는 냄새를 따라오고, 누군가는 그냥 조용히 앉아 눈을 감는다.1. 김유정의 '웃픈'김유정은 한국 단편소설의 ‘웃픈’ 아버지쯤 된다. , , 같은 작품은 입을 벌려 웃게 만들지만, 웃음 뒤에는 항상 이상한 가슴 먹먹함이 남는다. 그건 뭘까. 소리 내어 웃다가, “근데 이게 왜 웃기지?” 하고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그 순간 말이다. 문학이론가 김윤식은 이를 ‘해학적 리얼리즘’이라 불렀다... 2025. 6. 15.
입이 말하는 서사: 판소리와 구비문학 1. 판소리와 구비문학어릴 적, 어느 날 저녁이었다. TV는 꺼졌고, 벽지는 구겨졌고, 바람은 찬데 라면은 끓고 있었다. 할머니는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입을 열었다. “옛날에 말이여…” 그때 나는 알았다. 문학은 종이에만 적히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종종 잊는다. 문학이란 활자 이전에 소리였고, 몸짓이었고, 숨결이었다는 걸. 학자 김열규 선생은 이런 구비 문학, 즉 말로 전해지는 문학을 연구하며 한국인의 이야기 본능을 “살아 있는 것들의 기록”이라 했다. ‘구비’(口碑)는 말 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다. 입구(口) 자에 비석 비(碑), 말하자면 말로 새겨지는 무형의 비석이다.도깨비가 뛰어다니고, 호랑이가 말을 하고, 신랑을 삼킨 구렁이가 몸을 뒤집는다. 이건 그냥 웃긴 이야기가 .. 2025. 6. 13.
"시는 왜 갑자기 줄을 바꿀까?" - 한국 현대시의 기법과 형식 실험 1. 한국 현대시의 기법과 형식 실험에 대하여종이에 잉크가 ‘또르르’ 굴러가던 시대가 있었다. 시를 쓰는 일은 물 위에 뜨는 나뭇잎처럼,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형식은 정해져 있었고, 감정은 그 안에서 찰랑거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시가 틀을 부수기 시작했다. 한 줄이 짧아지고, 단어가 튀어나오고, 문법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시가 마치 슬리퍼를 질질 끌고 골목을 도는 아이처럼 제멋대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2. 형식을 부수다한국 현대시의 가장 큰 특징은 형식 실험이다. 이 실험은 단순히 ‘시를 다르게 써보자’는 취향이 아니다. 삶이 달라졌고, 언어가 달라졌기 때문에 시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예전엔 4 음보, 7 음보 같은 리듬에 맞춰 시를 썼다. 이건 음악처럼 일정한 박자를 가진 시라고 보면 된다.하지.. 2025. 6.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