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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속 가족: 밥상 위의 침묵

by Godot82 2025.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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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속 가족-한국 문학-가족
한국 문학 속 가족-한국 문학-가족

 

1. 한국 문학 속 가족

가족은 왜 그렇게 말이 없었을까 아니, 말을 하긴 했다. 다만 그 말은 침묵보다 더 뾰족했다. 꾹꾹 눌러썼다가 찢어버린 편지 같았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그런 편지 중 하나다. 엄마는 늘 무언가를 참았고, 딸은 늘 무언가를 알아버렸다. 부엌에서 들리는 국 끓는 소리, 종이장 넘기는 소리, 옆방에서 누가 문지방을 밟는 소리. 이런 것들이 문학이 되었다.

박완서는 ‘분단 가족’이라는 틀에서, 실은 여성과 엄마로서의 자기 존재를 질문했다. 페미니즘 비평가 정희진은 이것을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 부른다. 가족은 제도였고, 제도는 폭력이었고, 폭력은 일상이었다. 그렇게 밥상 위 국물처럼 가족은 흘렀고, 말라붙었고, 다시 덮였다.

2. 산업화와 가족

70~80년대 산업화의 문턱을 넘으면서, 가족은 고장 났다. 아버지는 공장에서 늦게 돌아오거나, 술에 취해 돌아오거나,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 가족은 지켜야 할 무엇이 아니라, 견뎌야 할 구조물이 되었다. 복지관 철제 의자처럼 차갑고 낡았고, 그래도 앉아야만 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이 고장을 가장 잘 기록한 책 중 하나다. 가족 모두 제각각 가난과 싸우고 있다. 대물림되는 가난과 차별, 공정하지 않은 재개발 앞에 아버지는 계속 작아지기만 한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말 그대로 ‘공’을 쏘아 올렸다. 하늘에 닿지는 못했지만, 독자들의 가슴에 튕기듯 부딪혔다. 보통의 가족은 그렇게 무너져갔다.

3. 처음 만난, 가족

90년대 이후 문학은 가족을 해체한다. 더는 ‘혈연’이 중심이 아니다. 입양, 재혼, 동거, 1인 가구. 작가들은 이런 비정형 가족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는 ‘싱글’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외롭고 동시에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보여준다.

퀴어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는 “정체성은 고정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는 문학 속 가족도 마찬가지다. 황정은의 소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百의 그림자』에서는 ‘가족’이란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 있음’과 ‘머무름’이 있다. 피보다 더 짙은 정서적 유대. 그런 것이 새로운 가족이 된다. 마치 문을 두드리지 않고 그냥 같이 눕는 감정처럼.

문학은 지금도 ‘가족’을 쓰고 있다. 다만 그 가족은 꼭 엄마 아빠와 자식이 아니라, 고양이와 노인, 외로운 친구와 룸메이트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매일 밥을 나누는 존재들, 문학은 그들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가족’은 혈연에서 마음으로 이사했고, 독자들은 그 집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4. 마치며

가족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다만 그 형태가 달라졌고, 모양과 소리가 바뀌었다. 예전엔 부엌에서 들려오는 국 끓는 소리가 가족의 심장 박동이었다면, 이제는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이들이 스마트폰으로 “잘 지내?” 하는 메시지를 보내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 발신음과 수신음이 새로운 심장이 뛰는 소리다. 조용히, 꾸준히, 문학은 그 심장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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