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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기억의 문학사: 한국 전쟁 문학

by Godot82 2025.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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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문학
한국 전쟁 문학

 

1. 한국 사회와 전쟁 문학

전쟁은 총알만 남기지 않는다. 부스럭거리는 침묵도 남긴다. 책 속에 낀 마른 은행잎처럼,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안은 누렇게 무너져 있다.

한국의 전쟁 문학은 그런 침묵을 종이에 꾹꾹 눌러 새긴 것이다. 피로 쓴 건 아니지만, 피냄새가 난다. 김동리의 〈무녀도〉에서 흔들리는 굿판의 북소리는 총성보다 더 크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낭만의 대명사처럼 불리지만, 그건 전쟁 이전의 소중함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경고장이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다, 너도 예외는 아니다’라는 말.

2. 한국 전쟁 문학의 태동: 쏟아진 탄환, 쏟아진 문장

전쟁은 1950년에 시작됐지만, 문학은 그보다 빠르거나 느리게 반응했다. 누군가는 탱크가 지나간 자리에서 시를 썼고, 누군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침대 밑에서 총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전쟁 문학은 단순히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다. 총알이 아닌 단어로 싸운 사람들이 있었고, 그 단어는 사람들의 귀에 총성처럼 울리기도 했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전쟁 문학은 흔히 참전 문학(participation literature)과 반전 문학(antiwar literature)으로 나뉜다. 이 분류를 본격화한 건 미국의 문학 연구자 폴 퍼셀(Paul Fussell)이다. 그는〈전쟁과 현대 기억〉이라는 책에서 “전쟁이 인간의 언어를 어떻게 바꾸는가”에 집중했는데, 이 개념은 한국 문학에서도 그대로 통한다.

오상원의〈유예〉나 김승옥의〈무진기행〉은 이 분류를 넘나드는 작품이다. 총을 든 자와 총을 들지 않은 자, 모두가 전쟁에 짓눌려 있던 시기였다.

3.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휴전선 위에 멈춰 선 채 시간만 흐르고 있다. 그 사이 문학은 상처를 꿰매고 있었다. 전쟁은 사람들에게 ‘기억’이라는 지뢰밭을 남겼다. 그걸 피해 갈 순 없었다. 그래서 문학은 차라리 지뢰를 밟고 폭발음을 기록하기로 했다. 황석영의〈손님〉은 그런 작품이다. 전쟁을 둘러싼 민간인 학살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전쟁은 괴물을 낳는다. 하지만 문학은 그 괴물에게 말을 걸어본다. “왜 그렇게 되었니?”라고. 그게 치유의 첫걸음이다.

4. 문학으로부터

구술 문학의 중요성도 크다. 이름 없는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 무명 씨의 기억들, 이것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파편이 된다. 다큐멘터리적인 시도도 많았다. 박완서의〈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자전적 기억을 통해 전쟁과 여성, 가족, 생존을 교차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 하나. 트라우마 서사(narrative of trauma)다. 정신분석학자 캐시 카루스(Cathy Caruth)가 이론적으로 정리했는데, 고통은 말로 바로 표현되지 않고, 시간이 지난 후에야 돌아온다고 말한다. 한국 전쟁 문학도 그렇다. 70년대, 80년대를 지나면서야 ‘말해도 되는 시기’가 왔다. 그전까지는 침묵만이 허락되었다. 

5. 마치며

이문열의〈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전쟁 자체를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구조, 즉 힘의 논리, 상명하복의 폐해, 침묵의 강요가 한국 사회의 전후유산이라는 점에서 전쟁 문학과 연결된다. 전쟁이 끝나도, 전쟁은 다른 형태로 계속됐던 것이다. 교실이라는 병영, 직장이라는 전선, 가족이라는 전후 트라우마까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을 말할 수밖에 없다.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 갑자기 터지는 분노, 이유 없는 눈물. 이런 감정은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기록되고, 축적되고, 누군가의 문장이 된다.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끝내야 할 이유도 없다. 전쟁은 반복될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계속 써야 한다. 오늘의 평화도, 어쩌면 거대한 휴전일 뿐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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