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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말이 내 안에 머물다: 증언적 믿음(testimonial belief)

by Godot82 2025.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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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적 믿음-testimonial belief
증언적 믿음-testimonial belief

 

1. 증언적 믿음(testimonial belief)

어느 늦은 오후였다. 전기포트에 물을 데우며, 오래전 엄마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비가 오면 할머니가 무릎이 쑤셨다고 했지.” 그 말은 설명도, 근거도 없이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할머니의 무릎도, 그녀의 통증도 직접 본 적 없지만, 이상하게 그 문장은 오랫동안 ‘사실’처럼 남았다. 철학에서는 이런 식의 믿음을 **증언적 믿음(testimonial belief)**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직접 보거나 경험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말에 의지하여 받아들이는 믿음. 사람은 대부분의 세계를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타인의 말을 통해,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그 말이 스며든 작은 문장들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증언적 믿음은 그래서 불완전하고, 흔들리기 쉽다. 그러나 따뜻하다.

2. 증언적 믿음의 본질

증언적 믿음의 본질은 간단하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네가 말했으니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가장 복잡한 믿음이기도 하다.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서로의 꿈을 응원했지만 결국 다른 길을 가게 된 두 사람이 잠시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 우리는 그들이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속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

 

영화는 그들의 눈빛을 통해 우리에게 말할 뿐이다. 그 눈빛에 담긴 진심을 우리는 증언적 방식으로 믿는다. 영화의 말, 카메라의 말, 서사의 말. 우리는 그것들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감정을 느낀다. 증언적 믿음은 사실 예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예술은 언제나 말한다. “내가 바라본 이 장면을 너도 믿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종종 고개를 끄덕인다. 이해보다 먼저 믿음이 온다.

3. 말의 진실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하지만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누군가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이 문제는 철학에서도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어떤 이들은 “말을 믿으려면 근거가 필요하다”라고 말했고, 또 어떤 이들은 “증언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근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스스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을 매일 믿는다.

 

날씨 앱이 내일 비가 온다고 말할 때, 기상학을 모르는 우리는 결국 앱의 말을 믿고 우산을 챙긴다. 친구가 “그 사람, 좋은 사람이더라”고 하면 그 말만으로도 우리는 누군가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말은 언제나 다른 말로 확인되지 않는다. 말은 말 자체의 톤, 눈빛, 맥락, 그리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통해 신뢰를 얻는다.

4. 목소리 그 자체를 믿는다는 것

증언적 믿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는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쿠퍼가 우주에서 딸 머피의 메시지를 오랜만에 받아보는 장면. 그는 머피가 보내온 영상 속 말들을 진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그저 목소리 자체를 통해 믿는다. 그 목소리는 증언이다. 그녀의 얼굴을 통해 전달되는 떨림과 숨소리, 말의 속도,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신뢰를 구성한다. 증언적 믿음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 속에 담긴 사람의 살아 있는 흔적을 감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사람을 믿는 것이고, 그 사람의 말이 세계에 가 닿는 방식을 믿는 것이다.

5. 거짓말도 증언일까?

그렇다면 거짓 증언은 어떨까? 누군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속이는 말은? 증언적 믿음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거짓말조차도 증언의 구조를 따른다.” 왜냐하면 거짓말도 우리가 믿으리라는 기대 위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주인공 프랭크 애버그네일처럼 정교한 사기꾼은 단지 말로 속이지 않는다.

 

그는 말의 분위기, 말의 태도 즉 '증언의 질'을 흉내 낸다. 증언적 믿음은 말의 내용보다 말을 둘러싸고 있는 신뢰의 구조에 더 깊게 뿌리내려 있다.

6. 사회는 증언 위에서 움직인다

증언적 믿음은 개인의 사적인 경험을 넘어 사회 전체를 움직인다. 사실 뉴스, 교과서, 정부 발표, 과학 논문, 이 모든 것은 ‘증언의 복잡한 층위’다. 우리는 모두를 검증할 수 없기에 수많은 전문가의 말, 수많은 언론의 말, 수많은 기관의 말을 신뢰의 네트워크 안에서 믿는다.

 

이 네트워크가 흔들릴 때, 가짜뉴스가 번지거나 그로 인해 신뢰가 무너질 때 사회는 방향을 잃는다. 영화 <돈 룩 업>에서 처럼 증언이 서로 충돌하고,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운 시대에 증언적 믿음의 문제는 훨씬 더 절박해진다.

7. 우리는 서로의 증인이 된다

진실은 말 속이 아니라 말을 건네는 타인의 존재 속에 있다. 엄마가 했던 말, 친구가 지나가듯 던진 말, 우리가 책에서 읽은 문장들, 영화 속 배우의 눈빛, 그 모든 말은 우리 안에서 투명한 물결처럼 흔들리며 어느 순간 하나의 ‘믿음’으로 자리 잡는다. 결국 증언적 믿음은 우리 모두가 서로의 증인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는 직접 모든 것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의 말 속에 실린 감정, 기억, 떨림을 통해 그 사람이 본 세계의 조각을 함께 건너갈 수 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아름다운 방식이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통해 세계를 배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투명한 실, 보이지 않지만 단단하게 연결된 그 신뢰의 끈을 통해 우리는 세계에 발을 디딘다.

 

말은 우리를 속이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의 진실이 아니라, 그 말을 건네는 순간의 진심의 결이다. 말은 언제나 물결처럼 흔들리며 우리에게 닿는다. 증언적 믿음은 그 물결 속에서 우리가 서로를 신뢰하며 건너가는 작은 다리다. 그 다리는 언제나 우리 곁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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