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현상학 Phenomenology 現象學
어느 날 퇴근길, 커피를 들고 골목을 걷다 멈춰 선 적이 있다. 바람이 불어 종이컵의 표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작은 진동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때 문득 ‘지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어졌다. 현상학은 바로 그런 물음에서 시작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후설(Edmund Husserl)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 그 자체로 돌아가라.” 그는 철학이란 머릿속의 추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세계의 경험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복잡하게 들리지만, 사실 일상의 단순한 감각 속에 있다.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음악을 듣는 일, 우리는 늘 어떤 ‘대상’을 보고 있지만, 그 대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현상학은 그 ‘모르는 감각’을 붙잡으려는 노력이다.
2. 감정이 아니라 ‘느낌’을 보는 법
넷플릭스 시리즈 <비프(Beef)>를 떠올려보자. 주인공들이 분노에 휘말려 도로에서 싸움을 벌이지만, 그 싸움의 진짜 무게는 ‘분노’라는 감정 자체보다 그 감정이 일어나는 방식에 있다. 상대의 눈빛, 도로 위의 햇살, 자동차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 그 모든 ‘감각의 배열’ 속에서 분노는 형체를 얻는다.
현상학은 바로 이 감각의 배열을 주목한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후설 이후의 현상학자들은 그것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라고 본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에서 기억을 지우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존재하던 세계의 질감이 무너진다.
카페의 조명, 코트의 질감, 그때의 공기 냄새까지 함께 사라진다. “사랑이란 감정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현상학은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이 아니라, 두 사람이 공유한 세계의 표면 위에 있다.
3. ‘사실’이 아니라 ‘보는 방식’
사람들은 종종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상학은 말한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이미 누군가의 시선이 개입된 말이라고.
마블 영화 속 영웅들은 언제나 ‘도시’를 구하지만, 우리는 그 파괴된 도시를 어떻게 보는가? <어벤져스>의 전투 장면에서 대부분의 관객은 영웅의 활약을 본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배경에 깔린 유리 파편, 무너진 표지판,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에 눈을 돌린다. 같은 장면이지만, 다른 세계를 본다.
현상학은 ‘보는 방식의 차이’를 철저히 탐구한다. 그것은 단순히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이해하는 태도의 문제다. 후설의 제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했다. “존재는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남의 방식 속에서만 이해된다.” 그 말은,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도 결국 어떤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현상학은 냉정한 분석이 아니라, 오히려 섬세한 감각의 예술에 가깝다.
4. 예술가의 시선, 현상학자의 시선
한 장의 사진을 보자.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자화상 시리즈처럼, 사진 속의 ‘나’는 내가 아니고,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이미지를 ‘자기표현’이라 부르지만, 사실 셔먼은 그 ‘표현되는 나’의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지각의 구조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볼 때 이미 ‘의미’를 투사하고 있다. 그 투사를 멈추고, 잠시 ‘그것이 나에게 나타나는 방식’을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술의 근원에 다가간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밥 딜런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은 “거칠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진실하다”라고 한다. 그러나 현상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단순한 평가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귀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의 차이다. 음색, 숨소리, 쉼표, 반복되는 리듬의 미세한 떨림 속에서 우리는 ‘진실’을 느낀다. 그때 예술은 감정의 전달이 아니라, 감각의 구조가 드러나는 사건이 된다.
5. 사물의 온도와 나의 위치
현상학은 철학의 언어로 들리지만, 사실 그것은 살아있는 감각의 윤리학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대할 때, 그 사람을 ‘타자’로 인식하기보다 하나의 현상으로 경험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현상학적 태도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영화 <더 스퀘어(The Square)>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미술관 앞 광장에 설치된 ‘신뢰의 구역(The Square)’ 안에 서면, 그 안에서는 누구나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구역 안에서도 여전히 서로를 의심하고, 피하고, 계산한다. 그 장면은 묻는다. “우리는 정말로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해석하고 있을 뿐인가?” 현상학은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사물을 온전히 보기 위해선, 먼저 나 자신이 그 안에 서야 한다.” 사물의 온도를 느끼는 일, 그것이 현상학의 시작이다.
6. 일상의 현상학
현상학은 어렵지 않다. 버스 창밖으로 비치는 오후의 그림자를 보며, 그것이 단순히 ‘그림자’가 아니라 ‘나의 시선이 닿은 세계의 한 조각’ 임을 느끼면 된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적 삶이다. 영화나 음악, 혹은 일상의 어떤 장면도 우리가 멈추어 본다면 모두 현상학의 장이 된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과 정보, 이미지 속에서 산다. 하지만 현상학은 그 모든 해석의 층위를 걷어내고, 다시 사물 앞에 서게 한다. 커피 한 잔의 온도, 스마트폰 화면에 비친 얼굴, 노래 한 구절의 울림. 그 속에 이미 세계는 있다. 예술이란 어쩌면 그 단순한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속 인물들이 그랬듯,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조용히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그 침묵 속에서, 비로소 사물은 말한다. “나는 여기 있다. 너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니?” 그 질문이야말로, 현상학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