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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픽션(autofiction): 자아와 허구의 경계에서

by Godot82 2025.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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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픽션-autofiction
오토픽션(autofiction)

 

1.  오토픽션(autofiction)

오토픽션(autofiction)은 자전적 서사와 허구적 상상이 모호하게 얽히는 문학 장르다. 1977년 프랑스 작가 세르주 뒤브로프스키(Serge Doubrovsky)가 자신의 작품 le Fils를 ‘자전이지만 진실에 얽매이지 않는 소설’로 정의하면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그는 “진실보다 더 진실 같은 글쓰기”를 시도했고, 이 개념은 이후 21세기 문학에서 폭발적인 확장을 보였다.

 

한마디로, 오토픽션은 ‘나’를 말하면서도 ‘나’를 가장하는 문학이다. 진실을 말하는 동시에, 그 진실을 문학적으로 꾸며낸다는 점에서 윤리와 허구, 고백과 연기가 교차하는 장르다. 오토픽션이 중요한 이유는 이 장르가 단순히 자기 고백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고백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실험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자서전이 ‘완결된 자아’, ‘성장과 극복의 서사’를 전제했다면, 오토픽션은 분열된 자아, 불완전한 기억, 애매한 책임의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작가 자신이 화자로 등장하지만, 그 화자가 말하는 “나”는 언제나 허구적 장치를 통해 왜곡되거나, 편집되거나, 가려진다. 이때 발생하는 모호함은 오히려 독자에게 더 강한 정서적 공명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고백은 선택이고, 모든 기억은 구조화된 환상이다.

2. 왜 오토픽션인가?

오늘날 오토픽션이 특히 의미 있는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자아란 더 이상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데 있다. SNS와 미디어를 통해 자아는 끊임없이 분열되고 전시되며, 때로는 의심받는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동시에 ‘진짜 나’란 무엇인지 점점 알 수 없게 된다.

 

오토픽션은 이 불확실성과 혼란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중심으로 파고든다. 무엇이 사실인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오토픽션은 이 질문을 문학적으로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르는 단순한 서사적 양식이 아니라, 현대적인 정체성 탐구의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장르가 가진 윤리적·미학적 위험도 분명히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기 고백이 곧 자기 과시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의 경험’이 ‘문학적으로도 가치 있는 이야기’라는 믿음은 자칫 독선이나 자의식 과잉으로 이어질 수 있다. 때로는 진실을 말하는 척하며 독자를 기만하거나, 고통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성공적인 오토픽션은 반드시 자신과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작가적 기술이 필요하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그 감정의 진실을 문학적으로 가공해 낼 수 있는 냉철함과 섬세함이 요구된다.

3.  오토픽션과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대표적인 오토픽션 작가로는 프랑스의 아니 에르노(Annie Ernaux)를 들 수 있다.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경험, 계급과 욕망, 시간의 흐름을 놀랍도록 절제된 언어로 기록했다. ‘어느 남자 이야기’, ‘사건’ 등은 자전적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강한 보편적 감정 이입을 유도한다. 

 

오토픽션은 독자에게도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누군가의 고백에 감동하는가? 진실은 허구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연기하는 일이 아닌가? 이 장르는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독자와 작가 사이의 윤리적 계약과 그 경계까지 실험하는 장르다.

 

결국 오토픽션은 문학 안에서 가장 현대적인 형식이며, 동시에 가장 오래된 질문, 즉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변주다. 그것은 사실을 말하되, 진실을 말하지 않을 자유를 가진 문학이며,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되, 허구로 도망칠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해 둔 이야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이야기에서, 문득 자신을 발견한다. 아니, 적어도 자신일지도 모를 어떤 ‘타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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