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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노래" - 고전 시가의 형식과 얼굴들 1. 한국 고전 시가의 형식과 주제가끔은 너무 길게 말하지 않는 것이 진심일 때가 있다. 한국 고전 시가는, 그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에 닿았다. 조용한 밤, 모닥불처럼 타오르는 말들. 화려하지 않아 더 오래 남는 문장들.시조, 삼장 구조의 정갈한 그릇과 같다. 한국 고전 시가에서 가장 대표적인 형식은 시조다. 시조는 세 줄로 이루어진 시. 각 줄은 다시 네 마디쯤으로 나뉘며, 전체 3장 구조다. 초장–중장–종장, 이름만 들어도 작은 흐름이 느껴진다. 초장은 상황을 열고, 중장은 감정을 키우고, 종장은 마무리. 마치 누군가의 고백을 조용히 듣고 있는 기분이다. 예를 들면, 황진이의 시조 중 하나는 이렇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강산하니 쉬어 간들 어.. 2025. 6. 10.
스마트폰 속 문학: 웹소설과 웹툰의 반란 1. 웹이라는 새로운 땅전철을 타면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사람들이 보인다. 종이책이 아니라, 손바닥 안의 세상에 빠져 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고, 또 누군가는 엄지를 빠르게 튕기며 다음 장면을 향해 간다. 그 속에 있는 건 글자나 그림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종이로 된 책이 아니다. 한국 문학은 이제 웹이라는 새로운 땅 위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야기의 물길을 바꾼 기술은 ‘디지털 전환’ 혹은 ‘미디어 전환(media convergence)’이라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이 개념은 미국의 미디어학자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가 처음 본격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서로 다른 콘텐츠들이 디지털 환경에서 융합되고, 독자와 사용자들의 참여가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쉽게 말해, 이야기.. 2025. 6. 9.
실존과 리얼리즘이 마주친 자리: <광장>과 <태백산맥> 1. 전후 문학한국 전쟁(1950~1953)은 총칼만 오고 간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도, 생각도 둘로 쪼개졌다. 그걸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란 쉽게 말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다.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남이냐, 북이냐. 사람이 사람을 찢어놓던 그 틈에서 작가들은 펜을 들었다. 그들이 만든 문학을 “전후 문학”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전쟁 이후의 문학이다.2. 최인훈의 『광장』(1960)은 최인훈의 데뷔작이자 한국 현대문학의 전환점이다.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남쪽의 자유에도, 북쪽의 평등에도 숨이 막힌다. 그래서 둘 다 아닌 제3국을 택하지만, 결국 바다에 몸을 던진다. 이 책의 제목인 ‘광장’은 사회적 소통의 공간이다.그러나 .. 2025. 6. 8.
고전은 물러나지 않는다: 춘향전과 홍길동전 1. 저항으로서의 "춘향전"우리는 고전을 ‘오래된 것’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고전은, 어쩌면 가장 느리게 다가오는 최신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마치 오래전 보낸 편지가 뒤늦게 도착하듯, 지금의 시간에 딱 맞게. 《춘향전》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판소리계 소설이다. 이름 없는 작가들이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가, 결국 글로 남긴 작품. 줄거리는 단순하다. 양반 이몽룡과 기생의 딸 춘향이 사랑에 빠지고, 이별과 고난을 겪은 뒤 다시 만나 해피엔딩을 맞는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춘향은 ‘부모 없는 여자’다. 당시로서는 가장 힘없는 존재. 그런데 그녀는 고개를 들고 거절한다. “나는 변 사또의 수청을 들 수 없습니다.” 거절의 말, 그것도 여성의 입에서 나온다.. 2025. 6. 6.
현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얼굴: 김영하 1. 현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얼굴 작가 김영하김영하의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치 조용한 밤길을 걷는 기분이 든다. 불빛은 희미하고, 바람은 조금 차갑고,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다. 오히려 묘하게 편하다. 그의 문장은 감정을 쏟아붓지 않는다. 절제된 문장, 건조한 시선, 그 안에서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이 솟아오른다. 이것이 김영하가 보여주는 현대 한국 소설의 새로운 얼굴이다. 김영하(1968~)는 자신을 “이야기꾼이기보단 사건 기록자”라고 말한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언제나 ‘어딘가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기억에서, 가족에서, 현실에서. 그는 말한다. “이야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지만, 사건은 그냥 일어난다.” 이는 기존의 소설이 가진 전통 서사 구조와는 조금 다르다... 2025. 6. 5.
한국 문학의 또 다른 얼굴: 신경숙과 은희경 1. 여자들은 어떻게 말하기 시작했는가오래전부터 이야기는 늘 남자의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전쟁에 나간 병사,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 영웅이나 비극의 주인공. 문학 속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여자들은 주로 그 곁에 있는 존재였다. 기다리는 사람, 희생하는 사람, 조용한 사람.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은 달라졌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이 바뀌었다. 말없이 참고만 있던 인물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신경숙과 은희경이 있었다.2. 신경숙신경숙(1963~)은 조용히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마치 오래된 냄비에 물을 끓이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그 안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슬픔, 상처, 그리고 꾹 참고.. 2025. 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