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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의 목소리 교차점들: 다성성(폴리포니)

by Godot82 2025.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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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의 다양한 목소리-다성성-폴리포니
한국 소설의 다양한 목소리-다성성-폴리포니

 

1. 폴리포니란 무엇인가?

폴리포니(polyphony)는 간단히 말하면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노래’요, 소설로 치면 여러 인물들이 각각 자기 목소리로 말하는 구조이다. 러시아 작가 미하일 바흐친이 이 개념을 철학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진짜 소설은 단일한 작가의 시선만이 아니라, 인물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서로 부딪치고 공명할 때 완성된다”라고 말했다.

바흐친은 소설이 작가의 독백이 아니라, 인물들의 대화라고 본 것이다. 서로 부딪히고, 충돌하고, 때로는 사라지고, 다시 튀어나오기도 하는 인물들의 ‘합창’ 말이다. 그 소리가 폴리포니다. 단 한 사람의 음정만 있는 건 칸타타가 아니라, 그냥 허전한 멜로디일 뿐이다.

2. 한국 소설에서 폴리포니

한국 소설에서도 여러 목소리를 섞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선 현실이 복잡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채롭고 사회가 중층적이다. 농촌-도시, 기성세대-청년, 남성-여성의 목소리가 다 다르다. 그리고 개인의 목소리가 분열적이다. 시민, 노동자, 여성 등 겹겹이 겹치는 정체성이 많다.

폴리포니는 이런 복합성을 문학적으로 담아내는 최적의 구조인 셈이다. 인물들이 서로 소리치고, 때로는 속삭이고, 나중엔 침묵까지 채워내는 이 겹겹의 목소리가 바로 바흐친이 말한 진정한 ‘소설의 깊이’인 것이다.

초기 한국 소설은 단일 시점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모더니즘 시대에 접어들며 박태원, 최서해, 이태준 같은 작가들이 인물 간 시선을 교차시키는 시도를 했다. 예를 들어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도시 속 부랑자들을 지나가며 다양한 시점을 교차시킨다. 목소리가 중구난방에서 들리는 도시의 골목을 걷는 느낌이다.

1990년대 이후, 조경란, 이청준, 한강 등이 폴리포니를 미묘하게 다루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청준의『당신들의 천국』은 관념적 목소리와 현실적 목소리가 함께 춤을 춘다. 한강의『채식주의자』는 부부의 시선, 친구의 시선, 심지어 내면의 목소리까지, 다층적 구조로 이야기를 쌓는다.

3. 왜 폴리포니가 중요할까?

폴리포니는 단지 구조상의 기법이 아니다. 그건 메시지이자, 읽는 방식이고, 세계를 보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여러 눈으로 본다는 선언인 것이다. 단일 시점이 단 하나의 진실을 말했다면, 폴리포니는 “진실은 다양하다”라고 단언한다.

 

독자는 연주자가 되기도 한다. 여러 목소리가 교차할 때, 독자는 책을 읽으며 각기 다른 음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친다. 언어와 의미를 스스로 조율해야 하는, 일종의 ‘해독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와 공명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한다. 가령 부모와 자식, 도시인과 농촌인, 노동자와 기계 관리자 사이의 거리감이 목소리 간 차이로 드러나면서도 동시에 한 소설 안에서 공명하는 구조를 가능케 한다.

4. 마치며

폴리포니는 단지 문학 기법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섞여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의 방식이다. 한국 소설에서 폴리포니는 단일한 목소리가 아닌 현실의 다층성을 찍어내며, 단절된 세계를 이어주는 ‘소리의 다리’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독자는 그 다리를 건너 자기 안의 차이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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