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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 3인칭, 그 사이를 걷는 문장들: 한국 문학에서 시점

by Godot82 2025.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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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시점-서술 방식
한국 문학의 시점-서술 방식

 

1. 시점이라는 문학적 렌즈

문학에서 ‘시점’이란, 이야기를 누구의 눈으로, 누구의 목소리로 보는지 결정하는 렌즈다. 1인칭(나), 3인칭(그/그녀), 전지적 작가 시점(모두 아는 신), 그리고 때론 ‘혼잣말처럼’ 되어버린 흐릿한 시점까지… 선택하는 시점에 따라 이야기는 눈빛과 눈물, 심지어 냄새까지 달라진다.

이 개념을 체계화한 사람은 러시아 형식주의 연구자이자 서사 이론가인 블라디미르 프로프와 게랄트 게나트 같은 이들이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내러티브 이론가 제럴드 프래터는 ‘시점에 따라 독자가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감정 이입을 하는지’를 명확히 구분했다. 

2. 한국 문학의 시점 탐색

처음 1인칭은, 마치 손 편지 같은 친밀함을 줬다. 예컨대 이태준의「해방 전후」에서는 ‘나’를 중심으로 일상의 파편이 모였다. 붓끝이 종이에 조용조용 내려앉는 것 같은 시점이었다. 또 다른 예로 염상섭의『만세전』은 내면 독백이 자주 끼어들어 1인칭 효과를 낸다. 그 시절 1인칭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닌 독자를 불러와 비밀을 공유하는 파트너처럼 만들었다.

1930~60년대가 되면, 전지적 작가 시점이 리얼리즘의 주력 수단이 된다. 작가는 ‘신’처럼 모든 걸 보고, 말하고, 판단하며, 때론 끄적끄적 해설을 덧붙이곤 했다. 대표작 박경리의『토지』, 조정래의『태백산맥』, 황석영의『장길산』같은 긴 서사에서는 시간 축을 넓게 보고, 다양한 인물들을 모두 아우르며, 농촌과 도시, 계급과 역사까지 녹여냈다.


전지적 시점은 문학이 영화의 롱테이크처럼 느껴지도록 만든다. 시야가 넓어질수록, 이야기는 숙성되고 확장된다.

1960~80년대에 접어들며, 작가들은 시점을 깼다. 이청준은『눈길』1인칭 주인공으로 전개는 되지만 시선을 한 인물에게 고정시키지 않고, 흐릿하게 변화시키며 정신 속 ‘미로’를 문장으로 구현했다. 또 최인훈의『광장』에서는 1인칭 반(半)과 전지적 시점이 번갈아 등장하며 주인공의 정체성 혼란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1990년대 이후, 시점은 더 유연해지고, 더 다층적으로 변화한다. 한강의『채식주의자』는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같은 사건을 세 번 다시 읽어야 이해할 수 있게 짜였다. 각 목소리는 깨지듯 연결되고, 마치 깨진 유리 조각 같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빛을 반사하는 느낌이다.

3. 왜 시점은 중요할까?

시점이 바뀌면, 낯설게 느껴진다. 1인칭은 숨결이 느껴지도록 가까이 다가오고, 전지적 시점은 풍경 전체를 환하게 조명하며, 교차 시점은 각자의 목소리가 섞이는 방식으로 시공간을 흩뜨린다. 소설에서 시점은 결국 독자와의 거리 조절사인 셈이다. 가까이 붙이거나, 멀리 밀거나, 서서히 흔들거나… 이 조절 하나로 느낌은 놀랍도록 달라진다.

시점은 단지 기술이 아니다. 시점은 곧 태도이고, 감정이고, 존재의 형태이다. 한국 문학에서 시점의 변화는 일상이 모자이크로 부서지고, 정체성이 파편처럼 흩어지고, 독자는 그 파편들을 다시 조각하며 자기 얼굴을 어렴풋이 보게 된다. 누군가 ‘나’를 이야기하게 놔둬라. 시점을 바꿔줄 때 세상이 뒤집히는 걸 보게 될 것이다.

문학은 계속 시점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자기 위치를 다시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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