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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없지만 존재하는 목소리: 소설 속 서술자

by Godot82 2025.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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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서술자의 역할-서술자
소설 속 서술자의 역할-서술자

 

1. 서술자

서술자는, 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쓰는 순간마다 창문을 닦고, 그 창문 너머로 우리가 서 있는 방까지 희미하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이다. 한국 소설 속 서술자는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말하지 않아도 물결이 일면 이미 존재감을 전한다.

2. 시선의 시점들

가장 친숙한 서술자는 부분적으로 전지적 전능자의 눈을 가진 목소리,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감자』의 그 잔잔한 문장처럼 “그녀는 알았으리라”라고 한 줄 읊으며, 인물의 속마음 전체를 훑어버린다. 그러나 한국 소설에는 때로 전지적 시선 대신 마디마디 호흡하듯 턱 걸리는 ‘나’가 있다. 이 1인칭 서술자는 결정되지 않은 존재를 서술하며 서술 자체가 흔들리는 사람임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서술자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기도 하다. 김영하가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보여준 것처럼 서술자는 자신의 기억을 되짚고 또 다른 목소리가 그 기억을 덮어쓰도록 허용한다. 이 다층의 목소리는 서술자 자신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의 글은 결국 자기 자신마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 상태에서 완성된다.

 

서술자는 종종 ‘우리’가 되기도 한다. 공지영의『도가니』에서는 그곳에 서 있는 자신을 떠올린다는 문장을 통해 서술자를 개인이 아닌 공공의 목소리로 확장시킨다. “우리”는 이제 사건의 목격자가 되어 거짓을 고발하고, 진실을 소환하는 힘을 얻게 된다.

또한,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은 서술자가 독자를 공동의 목격자로 만드는 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이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 서술자는 텍스트 안팎을 넘나드는 모호함을 독자 속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는다.

이처럼 한국 소설의 서술자는 전지적 권력자이기도, 머뭇거리는 ‘나’이기도, 기억을 되잡는 불안정한 목소리이기도 하며, 어떤 순간에는 공동체를 대표하는 ‘우리’가 되기도 한다.

3. 마치며

서술자의 이런 다양성은 단지 목소리의 문제를 넘어서 이야기 전체의 윤곽과 깊이를 결정한다. 전지적 시선은 인물의 속까지 기웃거리지만 때로는 감정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도 있다. 1인칭 화자는 내적인 떨림을 전하지만 그 떨림은 종종 침묵보다 무거워진다. 다층 구조는 미스터리를 주지만 종국엔 기억의 신뢰마저 위태롭게 한다.

이야기를 쓰는 그 순간, 서술자가 자신의 목소리와 싸우는 방식이 그 문장의 진실감을 결정한다. 그래서, 좋은 서술자란 “자신을 완전히 지우고 소리 내는 사람” 이기보다, “자신의 숨결을 남기며 그 그림자가 창문 안팎을 흔들도록 하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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