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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물러나지 않는다: 춘향전과 홍길동전 1. 저항으로서의 "춘향전"우리는 고전을 ‘오래된 것’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고전은, 어쩌면 가장 느리게 다가오는 최신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마치 오래전 보낸 편지가 뒤늦게 도착하듯, 지금의 시간에 딱 맞게. 《춘향전》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판소리계 소설이다. 이름 없는 작가들이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가, 결국 글로 남긴 작품. 줄거리는 단순하다. 양반 이몽룡과 기생의 딸 춘향이 사랑에 빠지고, 이별과 고난을 겪은 뒤 다시 만나 해피엔딩을 맞는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춘향은 ‘부모 없는 여자’다. 당시로서는 가장 힘없는 존재. 그런데 그녀는 고개를 들고 거절한다. “나는 변 사또의 수청을 들 수 없습니다.” 거절의 말, 그것도 여성의 입에서 나온다.. 2025. 6. 6.
현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얼굴: 김영하 1. 현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얼굴 작가 김영하김영하의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치 조용한 밤길을 걷는 기분이 든다. 불빛은 희미하고, 바람은 조금 차갑고,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다. 오히려 묘하게 편하다. 그의 문장은 감정을 쏟아붓지 않는다. 절제된 문장, 건조한 시선, 그 안에서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이 솟아오른다. 이것이 김영하가 보여주는 현대 한국 소설의 새로운 얼굴이다. 김영하(1968~)는 자신을 “이야기꾼이기보단 사건 기록자”라고 말한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언제나 ‘어딘가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기억에서, 가족에서, 현실에서. 그는 말한다. “이야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지만, 사건은 그냥 일어난다.” 이는 기존의 소설이 가진 전통 서사 구조와는 조금 다르다... 2025. 6. 5.
한국 문학의 또 다른 얼굴: 신경숙과 은희경 1. 여자들은 어떻게 말하기 시작했는가오래전부터 이야기는 늘 남자의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전쟁에 나간 병사,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 영웅이나 비극의 주인공. 문학 속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여자들은 주로 그 곁에 있는 존재였다. 기다리는 사람, 희생하는 사람, 조용한 사람.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은 달라졌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이 바뀌었다. 말없이 참고만 있던 인물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신경숙과 은희경이 있었다.2. 신경숙신경숙(1963~)은 조용히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마치 오래된 냄비에 물을 끓이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그 안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슬픔, 상처, 그리고 꾹 참고.. 2025. 6. 4.
1960년대 모더니즘과 실존주의: 김승옥과 최인훈 1. 1960년대 모더니즘과 실존주의1950년대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피와 눈물로 적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 작가들은 다르게 쓰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한 비명 대신, 그 비명을 삼킨 사람들의 침묵을 그렸다. 이 새로운 흐름을 모더니즘과 실존주의라고 부른다.2. 모더니즘모더니즘은 “modern”이라는 단어에서 왔다. 말 그대로 ‘현대적인 것’을 뜻하지만, 단순히 유행이나 신기함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전통적인 방식, 즉 똑같은 줄거리, 똑같은 인물, 똑같은 결말에 지친 사람들이 ‘다르게 쓰는 법’을 고민하며 만들어낸 문학의 방향이었다. 이 개념은 유럽에서 시작됐다. 대표적인 이론가는 T.S. 엘리엇과 제임스 조이스였다.그들은 “문학은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해체하.. 2025. 6. 3.
기지촌, 우리가 외면한 얼굴들: 영화 <거미의 땅> 1. 거미의 땅 (Tour of Duty)2016년 개봉한 김동령, 박경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은 미군 기지촌에서 살아온 세 여성의 삶을 통해 한국 사회의 잊힌 역사를 조명한다. 이 작품은 기지촌 여성들의 개인적 기억과 공간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들의 삶에 새겨진 상처와 고통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은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제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13회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등에서 상영되며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는 특별상을 수상하며, 기지촌 여성들의 이야기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2. 김동령, 박경태 감독김동령, 박경태 감독은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단순한 인터뷰나 재현이 아닌, 그들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박인순은 그림을 그리며, 안성자는.. 2025. 6. 2.
잊혀진 역사, 제주 4·3사건: 영화 <지슬> 1. 지슬 (Jiseul)1948년 11월, 제주도에서는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마을 주민들은 산속 동굴로 피신했다. 영화는 이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들은 곧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감자를 나눠 먹고, 집에 두고 온 돼지를 걱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피신은 끝나지 않는 세월로 이어졌다. 2013년 3월, 오멸 감독의 영화 가 개봉했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당시 한국 사회와 영화계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영화는 제29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한국 사회는 과거사 청산과 역사적 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으며, 영화 은 이러한 분위기 속.. 2025.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