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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깨어나는 순간: 방혜자가 남긴 생명의 흔적들

by Godot82 2026.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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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혜자_Bang Hai-Ja
방혜자_Bang Hai-Ja

1. 어둠을 투과하는 영원의 빛: 방혜자가 남긴 생명의 흔적을 따라서

겨울의 끝자락, 국립현대미술관(MMCA) 청주의 고요한 복도를 걷다 보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빛의 줄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 빛은 눈을 찌르는 강렬한 인공조명이 아니라, 오랜 시간 대지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가 비로소 숨을 내뱉는 것 같은 시원(始原)의 빛이다.

 

작가 **방혜자(Bang Hai-Ja)**의 작품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고요한 박동이자, 고단한 삶을 어루만지는 다정한 손길이다. 이제 곧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대중을 만날 고(故) 방혜자 작가는 '빛의 화가'라 불린다. 하지만 그녀가 그린 빛은 우리가 흔히 아는 전등의 빛과는 다르다.

 

그녀는 어둠이 있기에 빛이 존재함을, 그리고 그 빛이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뻗어 나옴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그녀의 작품에는 평생을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빛'이라는 화두에 매달렸던 그녀의 삶과 예술,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철학이 녹아 있다.

2. 파리의 이방인에서 세계를 밝힌 빛으로

방혜자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그녀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녀는 1937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61년, 한국 여성 작가로서는 드물게 프랑스로 떠난 '제1세대 재불 화가'다. 1961년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파리에 정착한 이후 반세기 넘게 빛을 탐구했다.

 

2012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상)을 받았으며, 2018년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작가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2022년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붓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초기 삶은 전쟁과 가난으로 얼룩졌으나, 프랑스라는 낯선 땅에서 마주한 고독은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캔버스 대신 한지와 부직포를, 유채 물감 대신 흙과 돌가루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서구의 기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정신성으로 서구의 예술을 치유하려는 시도였다.

3. 물질의 영혼을 깨우다: '배채법'이 빚어낸 깊이

방혜자의 작품을 처음 보면 "이 빛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화면 위에서 칠해진 것이 아니라, 화면 뒤에서부터 빛이 스며 나오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이는 그녀가 한국 전통 회화의 기법인 **배채법(Back-side painting)**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기에 가능하다.

 

배채법 (Back-side painting)은 비단이나 종이의 앞면이 아닌 뒷면에서 색을 칠해, 그 색이 앞면으로 은은하게 배어 나오게 하는 기법이다. 색의 강렬함보다는 깊이와 은은한 광채를 강조할 때 사용한다. 이 기법을 일상의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스마트폰이나 TV 스크린을 볼 때 '백라이트(Backlight)'라는 존재를 안다.

 

화면 뒤에서 빛을 쏘아주기에 앞면의 이미지가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보이는 원리다. 방혜자는 붓과 천연 안료를 이용해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이 '백라이트'를 구현했다. 그녀는 천의 뒷면에서 수없이 덧칠하고 두드려 색을 밀어 넣는다. 이렇게 탄생한 빛은 자극적이지 않다. 마치 이른 아침, 안개 낀 숲 속에서 나무 사이로 비쳐 드는 **틴들 현상(Tyndall effect)**처럼 몽환적이고 평화롭다.

 

대중예술 중에서는 영화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 식물들이 내뿜는 그 신비로운 빛을 떠올려보라. 인위적으로 만든 빛이 아니라 생명체 자체가 품고 있는 생체 발광(Bioluminescence)의 느낌, 그것이 바로 방혜자가 구현한 빛의 실체다.

4. 천연 안료와 한지: 대지의 기운을 빌려오다

그녀의 작업실은 화실이라기보다 연금술사의 방에 가까웠다. 그녀는 화학 물감 대신 전 세계에서 수집한 흙, 돌가루, 식물 즙과 같은 **천연 안료(Natural Pigment)**를 사용했다. 우리는 일상에서 '천연 염색' 옷을 입을 때 그 색이 주는 편안함을 느낀다. 방혜자의 작품이 주는 안도감도 바로 이 자연의 **물성(Materiality)**에서 온다.

 

그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를 겹겹이 붙이고 그 위에 황토, 쪽(인디고), 먹을 사용했다. 이는 마치 우리가 고운 흙을 손으로 만졌을 때 느끼는 따스함이나, 빗물에 젖은 바위가 내뿜는 깊은 검은색을 보는 경험과 같다. 대중적인 인테리어 디자인에서 '에코 인테리어'나 '내추럴 무드'가 유행하는 이유도 우리가 자연의 재료에서 본능적인 안식처를 찾기 때문이다.

 

방혜자는 캔버스를 하나의 작은 우주로 보고, 그 안에 대지의 기운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5. 샤르트르의 기적: 동양의 선(線)이 서구의 신심(信心)을 만나다

방혜자 작가 생애 최고의 업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Chartres Cathedral)**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이다. 8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고딕 양식의 정수 속에 한국 작가의 숨결이 담긴 것이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보통 '샤르트르 블루'라 불리는 강렬한 파란색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방혜자가 만든 4개의 창은 그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한국적 여백과 빛의 확산을 담아냈다. 그녀는 유리판 사이에 천연 안료를 넣고 굽는 복잡한 공정을 거쳐, 마치 우주의 성운(Nebula)이 폭발하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이 장면은 마블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묘사되는 찬란한 우주의 색감과 닮아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우주가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CG)이라면, 방혜자의 우주는 작가가 한 점 한 점 손으로 찍어낸 고통과 환희의 기록이다. 성당의 어두운 내부로 스며드는 그녀의 스테인드글라스 빛은, 종교를 넘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숭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광휘(Luminosity) 그 자체다.

6.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저장된 빛이 깨어나는 공간

이번 전시가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는 일반적인 전시장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이곳은 **보이는 수장고(Visible Storage)**를 표방하는 곳이다. 보이는 수장고 (Visible Storage)란 작품을 창고에 꽁꽁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보존과 보관의 과정을 관객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관 운영 방식이다.

 

방혜자의 작품은 청주의 이 거대하고 차가운 수장고 공간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견고한 보존의 공간 속에서, 그녀의 부드러운 빛의 작품들은 마치 잠들어 있던 생명체가 깨어나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청주 미술관에서 방혜자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한 예술가가 평생을 바쳐 캐낸 '빛의 광석'을 수장고라는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몰래 훔쳐보는 듯한 은밀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7. 당신의 내면에도 빛이 흐르고 있다

방혜자 작가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빛의 한 조각이 되고 싶다." 그녀가 그린 빛은 화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재된 선량함과 평화의 에너지를 상징한다. 우리는 너무나 소란스럽고 자극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SNS의 화려한 이미지들, 끊임없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뉴스들 속에서 마음은 쉽게 지치고 어두워진다. 하지만 방혜자의 작품 앞에 서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것은 그녀의 빛이 밖에서 비추는 조명이 아니라, 우리 안의 어둠을 뚫고 나오는 내면의 빛이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마주할 그녀의 작품들이, 당신의 지친 영혼에 따뜻한 배채법의 빛처럼 스며들길 바란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 선명해진다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진리를, 방혜자의 '검은 빛'과 '푸른빛' 속에서 직접 목격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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