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색채의 거인이 빚어낸 영원한 산: 유영국이 우리에게 건네는 뜨거운 위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으로 향하는 정동 길은 언제나 다정한 사색의 길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붉은 벽돌의 미술관 앞에 서면, 도심의 소음은 어느덧 아스라이 멀어진다. 이곳에서 마주하게 될 **유영국(Yoo Youngkuk)**의 전시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 거대한 자연의 에너지를 수혈받는 의식과도 같다.
그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다. 하지만 그 수식어만으로는 유영국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다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캔버스 위에 산과 바다, 그리고 해를 그렸지만,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풍경이 아니라 마음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근원적인 형태였다.
이제 곧 서소문에서 우리를 맞이할 유영국 작가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그가 붓끝으로 세운 찬란한 '색채의 왕국'을 한 편의 수필처럼 차분히 따라가 보려 한다.
2. 울진의 바다에서 도쿄의 전위까지: 거장의 궤적
유영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나고 자란 경북 울진의 자연을 기억해야 한다. 1916년, 깊은 산과 푸른 동해를 품은 울진에서 태어난 소년은 자연스럽게 대자연의 압도적인 색감을 내면에 새겼다. 1930년대 중반, 그는 일본 도쿄의 분카가쿠인(문화학원)으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도쿄는 서구의 모더니즘 바람이 거세게 불던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당대 가장 전위적인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추상'이라는 미답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귀국 후 일제강점기 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잠시 붓을 놓아야 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향에서 고깃배를 몰고 양조장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그 시기에도 그의 마음속엔 언제나 캔버스가 펼쳐져 있었다.
1948년 김환기 등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하며 한국 추상미술의 기틀을 닦았다. 이후 수많은 개인전과 국제 전시를 통해 한국적 추상의 독자적인 경지를 세계에 알렸으며, 200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직 '그림 그리는 노동'에만 매진했다. 그의 삶은 마치 거대한 폭풍우를 견뎌내고 우뚝 선 고산(高山)과 닮았다. 흔들림 없는 예술가적 양심과 철저한 자기 절제는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3. 기하학적 추상: 세상의 뼈대를 그리다
유영국의 작품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날카로운 직선과 완벽한 삼각형, 그리고 강렬한 원이다. 이를 미술 용어로 **기하학적 추상(Geometric Abstraction)**이라 부른다. 기하학적 추상 (Geometric Abstraction)은 점, 선, 면, 그리고 원이나 삼각형 같은 기하학적 형태를 사용하여 대상을 표현하는 추상 미술의 한 분야다. 구체적인 사물의 묘사를 배제하고 순수한 조형 요소들의 조화와 구성을 강조한다.
이 개념을 일상의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즐겨 하는 게임 **<마인크래프트(Minecraft)>**를 떠올려보라. 세상 모든 만물이 네모난 블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산을 보고 나무를 본다. 유영국 역시 세상의 복잡한 껍질을 벗겨내고 그 밑에 숨겨진 가장 단순하고 단단한 '뼈대'를 찾으려 했다.
대중예술로 비유하자면,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건물들이나 애플(Apple)의 미니멀한 제품 디자인과도 맥을 같이 한다. 불필요한 장식을 모두 제거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본질적인 아름다움, 유영국은 그것을 캔버스 위에 구현했다.
4. 색채의 연금술: 빨강과 파랑이 건네는 뜨거운 대화
유영국 작가의 별명은 '색채의 마술사'다. 그의 작품 속 빨강은 태양보다 뜨겁고, 파랑은 바다보다 깊다. 그는 색을 단순히 칠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서 색이 스스로 빛을 내게끔 **컴포지션(Composition)**했다. 컴포지션 (Composition / 구성)이란 화면 안에서 선, 형태, 색채 등의 요소를 배치하여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시각적 설계를 뜻한다.
그의 색채 감각은 영화 감독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분홍색과 보라색이 완벽한 대비를 이루며 관객의 눈을 사로잡듯, 유영국의 그림 속 보라와 노랑, 초록과 주황은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진다.
일상에서 우리가 스마트폰의 HDR(High Dynamic Range) 기능을 켜고 사진을 찍을 때, 어두운 곳은 더 깊게, 밝은 곳은 더 화사하게 살아나는 것과 비슷하다. 유영국은 물감을 겹겹이 쌓아 올리고 닦아내는 과정을 반복하며 색채의 밀도를 극대화했다. 그의 캔버스는 평면이지만, 그 안의 색들은 마치 3D 영상처럼 우리에게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5. 노동으로서의 예술: 7시 기상, 6시 퇴근의 미학
유영국은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그림 그리는 노동자'로 정의했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쉬지 않고 붓을 들었다. 그의 이런 규칙적인 생활은 마치 프로 스포츠 선수들의 **루틴(Routine)**과 같다.
축구 선수 손흥민이 매일 같은 훈련을 반복하며 최고의 감각을 유지하듯, 유영국은 매일의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감각을 벼려냈다. "산에는 정상이 없다. 올라가면 또 산이 있을 뿐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예술을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묵묵히 걸어가야 할 길로 보았다. 대중에게 보이는 화려한 결과물 뒤에는 이토록 고독하고 성실한 '노동의 시간'이 숨어 있었다.
6. 원형으로서의 산: 우리 모두의 마음속 풍경
유영국 그림의 영원한 테마는 '산'이다. 하지만 그는 산을 보고 그리지 않았다. 그는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산을 보면 평온함이나 경외심을 느낀다. 유영국이 그린 산은 특정한 지명의 산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이상향으로서의 산'이다.
그의 그림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 고요한 캔버스에서는 폭포 소리가 들리고, 숲의 향기가 나며,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느껴진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예정된 이번 전시는, 소음 가득한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 멈춰 서서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권한다. 유영국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지 않아도,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지 않아도, 우리 곁에 이토록 찬란한 우주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캔버스 위에 층층이 쌓인 물감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당신만의 산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힘들고 지친 일상 속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면, 유영국이 세워놓은 이 색채의 이정표를 따라 걸어보길 권한다. 거기에 당신을 기다리는 영원한 초록과, 당신의 가슴을 다시 뛰게 할 뜨거운 빨강이 있을 것이다.
그가 60년 넘게 묵묵히 닦아놓은 그 길 위에서, 당신도 당신만의 가장 아름다운 '본질'과 조우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