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0년 이후 한국 문학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은 시대의 중심에서 물러나 개인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분단, 민주화, 산업화 같은 거대 담론은 한 발 뒤로 물러섰고, 그 자리에 실직한 아버지, 자신을 해하는 십 대, 국경을 건넌 이주 여성, 우울을 견디는 개인이 서기 시작했다.
이제 문학은 “사회”보다 “나”를 말하고, “정의”보다 “관계”를 고민하며, “혁명”보다 “생존”을 이야기한다. 이 흐름은 단절이 아니라 전환이다. 한 줄기 강물처럼, 1980년대 민중문학이 사회의 구조를 파고들었다면, 1990년대 이후 문학은 구조 속에 놓인 개인의 내면 구조로 들어간 셈이다.
2. 개인의 고유한 삶
정치적 민주화가 일정 부분 성취된 1990년대, 문학은 ‘시대의 대변자’라는 역할에서 ‘개인의 고유한 삶’을 기록하는 언어로 변모한다. 문학평론가 황정아는 이를 “개인화된 감수성의 출현”이라 명명했다. “이제 사람들은 정치적 구호보다 자기만의 고통, 자기만의 기억에 더 많은 언어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정영문은 『검은 이야기 사슬』(1998) 같은 소설에서 소외된 개인의 존재론적 고독을 실험적 언어로 탐구했고, 김영하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1999)를 통해 도시적 인간의 분열된 정체성을 담백한 문체로 표현했다. 이들 소설은 사건보다 감정의 미세한 떨림에 주목한다.
3. 개인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
‘사적인 이야기’가 문학에서 의미 있는 위치를 점하기 위해선, 그것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망 안에서 해석 가능해야 한다.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이러한 흐름을 “사적인 것의 공공화”라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3)는 여성의 독립과 우정을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는 1990년대 한국 사회의 여성차별 구조, 이혼과 비혼을 둘러싼 시선, 직장 내 유리천장이 녹아 있다. 사적인 고민이 곧 사회적 의제였던 셈이다.
또한 신경숙의 『외딴 방』(1995)은 노동과 성장의 경험을 자전적으로 그리지만, 그것은 단지 한 작가의 성장기가 아닌, 당시 수많은 ‘공장 여공’들의 집단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4. 경계를 탐색하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이주 노동자, 결혼 이주 여성, 탈북민, 다문화 가정 자녀의 등장으로 단일 민족 담론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문학도 더 이상 ‘한국인’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 선 사람들의 언어를 듣기 시작했다.
윤이형의『큰 늑대 파랑』(2019)은 성소수자와 난민, 젠더 소외자들이 서로를 이해하며 공존하는 미래 사회를 그린다.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은 프랑스에 입양된 한국인 여성과 다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긴장을 다룬다. 이들은 모두 ‘내 나라’와 ‘내 정체성’을 묻는 기존 질문을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감각으로 뒤집는다.
문학 이론가 호미 바바(Homi Bhabha)는 이런 흐름을 “제3의 공간”(Third Space)이라 부른다. 기존의 정체성 경계가 무너지며 새로운 문화 혼종성이 등장하는 공간이다. 오늘날 한국 문학은 이 제3의 공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5. 경계를 허물다
이러한 내면성과 다문화성은 문체와 서사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 기승전결 서사는 자주 무너지고, 단편적 이미지나 파편화된 서사가 주를 이룬다. 한강의『흰』처럼 문장이 아니라 낱말들로 구성된 산문, 이슬아의 「일간 이슬아」처럼 일기와 편지 형식을 혼합한 글쓰기, 웹소설과 웹툰의 영향 아래 등장한 멀티플랫폼 서사까지. 문학의 형식도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문학이 ‘문학의 영역’ 안에만 머무르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일상의 언어, 짧은 호흡, 느슨한 구조 등 이제 독자는 더 이상 “위대한 문장”을 기대하지 않고, 나와 비슷한 문장을 찾는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문학은 마치 우리가 단톡방에서 쓰는 말의 변형 같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의 한국 문학은 조용히 자기 방 안에서 눈을 감고 감정을 탐색한다. 그것은 더 이상 혁명가의 언어가 아니며, 울부짖는 깃발의 언어도 아니다. 대신 누군가에게는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는 울음, 너무 약해서 표현되지 못했던 사랑, 너무 오래돼서 잊힌 이름을 불러낸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문학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