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험적 글쓰기?
소설이란 게 원래 그렇다. 뭔가 있어 보여야 할 것 같고, 뭔가를 말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대다수의 작가들은 ‘이야기’를 쓴다. 하지만 가끔, 어떤 작가들은 그냥 그 자체로 규칙을 부순다. “이야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붙잡고, 소설을 해체한다. 때려 부순다. 그러다 다시 붙인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문장은 뭔가 어긋나 있고, 낯설고, 당황스럽지만, 그 불편함이 바로 새로운 시작이다. 그걸 우리는 실험적 서사라고 부른다. 문학이 문학 바깥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들이다. ‘실험’이란 단어가 어렵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기존의 소설이 양복 입은 신사라면, 실험 서사는 청바지에 찢어진 티셔츠 입은 펑크족과 가깝다고.
2. 실험 소설의 이론적 뿌리: 미하일 바흐친과 롤랑 바르트
실험 서사에 대해 말할 때, 두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소설의 핵심이 ‘다성성(Polyphony)’이라고 했다.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목소리들이 충돌하고 교차하며 만들어진 혼란. 이건 단지 내용이 아니라 형식 그 자체가 ‘혼돈’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저자는 죽었다”라고 선언했다. 그 말은, 독자가 읽는 순간, 작가가 의도한 의미 따윈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형식도 자유로워야 한다. 줄거리, 시점, 등장인물, 장르조차 마음대로 뒤섞어야 한다. 독자와 작가가 공모하는 장이 아니라, 독자가 길을 잃게 만드는 숲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3. 한국 문학의 실험
1930년대, 이상의 『날개』는 한국 소설사에서 가장 낯설고도 명징한 실험이었다. 주인공은 '날자, 날자꾸나’를 반복해서 읊조리며, 방 안을 맴돌고, 창밖을 바라보고, 우리 모두가 모른 척했던 정신적 추락을 기어이 붙잡아낸다. 박태원은『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하루 동안 거리를 걷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간다. 이야기라기보다는 ‘의식의 흐름’이다.
내면의 독백, 끊임없이 튀는 생각, 산만한 기억, 무의식적 표류. 독자 입장에선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이지?” 싶지만, 그게 바로 목적이었다. 현실을 사실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현실을 경험하는 방식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1960~70년대에는 최인훈의『광장』이 등장한다. 이 소설은 남북의 이념, 철학, 고독, 인간의 경계에 대해 묻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소설의 끝이다. 주인공 이명준은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한 채 배 위에서 투신한다. 선택 없는 선택, 결말 없는 결말. 이는 소설의 서사 구조 자체에 균열을 내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김승옥은 『무진기행』에서 기억과 현재를 오가며, 시간의 선형 구조를 해체한다. 그의 문장은 종종 공기처럼 흐릿하고, 이야기는 안갯속을 걷듯 몽롱하다. “뭔가 있어 보이는데, 딱히 뭐라 말하기 힘든 것들.” 이것이야말로 서사 그 자체의 ‘재배열’이다.
1990년대 이후에는 여성 작가들이 실험의 전면에 나선다. 은희경은『아내의 상자』에서 여성 내면의 분열을 서사의 분절로 구현한다. 독자는 이 상자를 열어보고, 저 상자를 들어보고, 결국엔 ‘나’라는 존재가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최근 들어, 황정은이나 편혜영, 김초엽, 정세랑 같은 작가들이 SF, 판타지, 디스토피아, 로맨스를 오가며 실험의 경계를 더 넓히고 있다.
다중 시점과 시간 왜곡, 기록 문서의 서술 등 장르 혼합의 방식으로 새로운 서사 실험을 시도한다. 이야기는 줄거리보단 질문에 가까운 흐름이다. “우리는 어떤 세계를 원하나?” “그 세계는 누구의 것인가?" 때로는 찢긴 구조가 세상의 분열을 더 정확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
4. 마치며
문학은 우리에게 “우리는 언제나 조금 다르게 살아도 된다.”라고 말한다. 인생은 헝클어진 이야기고, 좋은 소설이라는 게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전 과는 다른 소설이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