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진실을 말하는 위험한 용기: 파레시아(Parrhesia)라는 삶의 예술

by Godot82 2026. 2. 11.
반응형

파레시아-Parrhesia
파레시아-Parrhesia

1. 파레시아(Parrhesia), 벌거벗은 진실의 목소리

고대 그리스어로 '모든 것을 말함'을 뜻하는 **파레시아(Parrhesia)** 파레시아는 고대 그리스어 '판(pan, 모든 것)'과 '레시스(rhexis, 발화)'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다. 이 개념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킨 미셸 푸코에 따르면, 파레시아는 단순히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이와 말해지는 진실 사이에 강력한 유대와 위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혼돈을 말하지만, 반대로 배트맨이나 고든 형사는 파멸의 위협 앞에서도 시스템의 진실을 지키려 한다. 파레시아는 바로 그 고든 형사가 부패한 경찰 조직 안에서 홀로 진실을 말할 때 발생하는 도덕적 에너지와 같다. 그것은 세련된 거짓말이나 화려한 수사학(Rhetoric)이 아니라, 투박하더라도 정직한 '벌거벗은 말'이다.

2. 구조주의를 넘어선 주체적 발화의 수행성

사회학의 구조주의(Structuralism)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사회 체계라는 거대한 틀 안의 부품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파레시아는 그 견고한 구조에 균열을 내는 **수행성(Performativity)**의 결정체다. 구조주의가 사회의 보이지 않는 규칙을 탐구한다면, 파레시아는 그 규칙이 잘못되었을 때 "이것은 틀렸다"라고 말함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행위다.

 

파레시아는 이 수행성의 가장 위험한 판본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 약을 먹고 가상 세계의 안락함을 버린 채 진실을 선택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네오의 선택은 단순한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매트릭스라는 견고한 시스템(구조) 전체를 뒤흔드는 수행적 발화다. 파레시아는 이처럼 안전한 침묵 대신 위험한 진실을 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진정한 **주체(Subject)**로 세우는 과정이다.

3. 대중문화 속의 파레시아: 픽션이 증언하는 진실

우리는 대중예술 속에서 수많은 파레시아스테스(Parrhesiastes, 파레시아를 행하는 사람)를 만난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문동은이 가해자들 앞에 서서 자신의 상처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그들의 죄를 묻는 행위는 사적인 복수를 넘어선 파레시아적 성격을 띤다. 그녀의 말은 가해자들의 견고한 카르텔을 무너뜨리는 날카로운 칼날이 된다.

 

또한, 영화 **'서울의 봄'**에서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직분과 군인 정신이라는 진실을 지키려 했던 인물들의 고군분투 역시 파레시아의 한 형태다. 그들은 자신이 죽거나 파멸할 것을 알면서도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파레시아는 말하는 이가 듣는 이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을 때, 즉 권력관계의 비대칭성 속에서 발생한다.

 

부하가 상사에게, 시민이 독재자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목숨을 걸고 건네는 진실의 조언이 바로 그것이다.

4. 현대 미술과 파레시아: 몸으로 쓰는 진실의 문장

현대 미술가들은 캔버스나 조각이 아닌 자신의 몸과 삶을 통해 파레시아를 실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중국의 예술가 **아이 웨이웨이(Ai Weiwei)**는 국가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 끊임없이 발언하고 기록한다. 그는 자신의 구금과 감시조차 예술적 아카이브로 만들어 세상에 공표한다. 이것은 현대 미술에서의 서로 다른 사물이나 파편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기법인 **아상블라주(Assemblage)**적 실천이기도 하다.

 

아이 웨이웨이는 흩어진 사회적 사건의 파편들을 예술이라는 틀 안에서 재조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파레시아적 선언문을 완성한다. 그의 작업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시대의 어둠을 직면하게 만든다. 작가의 몸이 곧 진실의 도구가 되는 이 수행적 예술은 파레시아가 단순한 '말'을 넘어 '삶의 방식(Ethos)'임을 증언한다.

5. 유목민적 사유와 파레시아의 일상적 실천

오늘날의 파레시아는 거창한 정치적 투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온라인 공간에서의 혐오에 침묵하지 않는 용기, 다수의 의견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소신을 밝히는 단호함 등 일상 곳곳에 숨어 있다. 유목주의(Nomadism)적 관점에서 파레시아는 고정된 편견과 도그마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실을 향해 사고를 이동시키는 행위다.

 

파레시아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진실은 대개 달콤하기보다는 쓰디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감수할 때 비로소 사회는 건강해지고 개인의 영혼은 자유로워진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아케인'**의 인물들이 각자의 신념을 위해 파멸을 무릅쓰고 진실을 외치는 모습은, 우리 내면에 잠든 파레시아의 불꽃을 자극한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곧 자신을 새롭게 빚어내는 창조적 행위다.

6. 진실의 빛으로 일구는 새로운 연대

파레시아는 고립된 영웅의 외침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진실 말하기가 다른 사람들의 공명을 일으킬 때, 그것은 비로소 사회적 연대로 나아간다. 영화 **'변호인'**에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진실의 법정을 지키려 했던 주인공의 모습은, 결국 바위를 깨뜨리는 것은 계란 속에 든 생명과 연대의 힘임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읽었던 영시 속 "진실은 결코 홀로 죽지 않는다"는 구절은 파레시아의 본질을 관통한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진실들을 말하기 시작할 때, 그 파편들은 아나추이의 술병 뚜껑처럼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황금빛 물결을 이룰 것이다. 파레시아는 결국 인간에 대한 신뢰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만 가능한 가장 고귀한 형태의 '정치적 예술'이다.

7. 마치며

당신은 오늘 몇 번의 진실을 삼켰고, 몇 번의 용기를 냈는가. 파레시아는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선택하고 훈련해야 하는 미덕이다. 그것은 나를 보호해주는 위선의 껍데기를 스스로 벗겨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 끝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존엄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파레시아스테스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사학적 포장이 아니라, 나의 내면과 일치하는 진실된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수행성이자 삶의 조각이다. 당신의 목소리가 떨리더라도 괜찮다. 그 떨림이야말로 당신이 진실의 문턱에 서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