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에 관하여
아침에 거울을 본다. 누구에게 보여줄 얼굴인지 생각한다. 직장에 갈 때와 연인을 만날 때, 친한 친구와 술자리로 향할 때. 표정이 다르고, 몸짓이 다르다. 내가 선택하는 옷 하나 말투 하나에도 내가 어떤 사람이길 원하는지가 스며 있다. 우리는 그걸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주디스 버틀러는 묻는다. 정말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우리가 반복해서 ‘연기해 온’ 것일 뿐인가?
버틀러는 ‘젠더는 수행(performance)된다’고 말했다. 무대 위 배우처럼 우리는 매일 ‘여성다움’이나 ‘남성다움’을 연기한다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본래 우리 속에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사회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길 바라는지를 보여주었고, 우리는 그 기대를 따라 조금씩 몸에 익혀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게 진짜 내 모습이라고 믿게 되었을 뿐.
2. 영화 속 그 캐릭터가 나보다 진짜 같을 때
가끔 넷플릭스를 보다가, 어떤 배우가 너무 자연스럽게 역할을 해내는 걸 보면 그냥 배역 그 자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수십 번 리허설한 결과다. 버틀러의 이론은, 젠더도 그런 리허설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영화〈빌리 엘리어트〉를 떠올려보자. 남자아이가 발레를 좋아할 수 없다는 시선 속에서, 아이는 춤을 춘다. 그 모습은 진짜 같다.
하지만 ‘진짜 같다’는 건, 그가 사회가 기대한 연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움직임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진짜’는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연기를 깨뜨릴 때 나타난다.
3. “여자는 원래…”라는 문장의 위험함
“여자는 원래 감정적이지.” “남자라면 눈물을 참고 살아야지.”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말이다. 버틀러는 그런 문장을 의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자니까’, ‘남자니까’의 방식이 얼마나 많은 삶의 가능성을 지워버리는지. 젠더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기대를 따라 몸에 새겨지는 것이다.
아이가 처음 걷는 순간부터 아니, 산부인과에서 분홍색 옷을 입혀줄 때부터 그 연습은 시작된다. 걸음걸이부터 목소리의 높낮이, 웃을 때 이는 얼마나 보여줄지, 분노를 표현할 권리가 있는지. 모두 젠더라는 무대 위에서 요구되는 몸의 언어들이다.
4. 카페에서 들려온 웃음소리를 듣고
카페에서 누군가 너무 크게 웃었다. 사람들이 힐끗 본다. 그 웃음의 주인이 여성이라면, 반응은 조금 더 예민해지기도 한다. “저 사람 왜 저래?” 작은 목소리가 테이블 사이를 지나간다. 버틀러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의 몸짓이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나면 불편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그 규범에 맞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규칙을 깨는 사람을 보면, ‘그동안 내가 지켜온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그 불편함은 변화가 시작될 수 있는 지점이라고.
5. 팝 음악, 가사, 그리고 젠더
마돈나의 〈Vogue〉, 레이디 가가의〈Born This Way〉, 그리고 최근의 빌리 아일리시의 느슨하고 비관적인 목소리까지. 이들은 모두 하나의 몸과 목소리가 정해진 형식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을 흔들어왔다. 가가는 말한다. “너는 태어난 그대로 완벽해.”
하지만 버틀러는 이렇게 되묻는다. “그 태어난 그대로는 정말 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 그 질문은 가혹하지만, 동시에 해방적이다. 왜냐하면 연기된 것이라면 다시 연기할 수 있고, 다른 방식으로 연습할 수 있으며, 무대 전체를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정체성’이라는 단어가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
나는 종종 정체성을 물어야 하는 순간을 피한다. 너무 무겁고, 단정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성’이라는 말보다, 내가 ‘이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버틀러에게 정체성이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과정이다. 정체성은 멈춰 있지 않는다. 오늘의 내가 어제와 같을 필요 없다. 연극은 매번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연기도 그렇다.
7. 우리는 모두 무대 위에 서 있다
버틀러가 말한 수행성은 단순히 ‘연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연기함으로써 진짜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무대가 우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가 무대를 바꿀 수도 있다. 넷플릭스의〈Heartstopper〉, 디즈니의〈겨울왕국〉, 혹은 더 멀리, 봉준호의〈기생충〉까지도 기존의 정형화된 ‘가족’, ‘성역할’, ‘계급’의 연기를 해체하면서 새로운 무대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버틀러가 기대한 순간이 아닐까. 기존의 역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이 다른 이들의 가능성까지 열어 줄 때.
8. 마치며
젠더는 내가 누구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나는 어떤 움직임을 살아내고 싶은가의 문제다. 버틀러의 이론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이 반복해온 몸짓을 의심하라. 그리고 새로 선택하라. 연기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게 가능성의 시작이다.” 오늘의 내가 무대 위에서 고른 한 걸음이, 내일의 나를 조금 다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