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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는 것들의 강가에 서서: 레테(Lethe)

by Godot82 2025.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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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테-Lethe
레테-Lethe

 

1. 레테-Lethe

잊어버린다는 것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걸까? 때때로 나는 어떤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손가락 끝에서 맴도는 느낌을 받곤 한다. 눈앞까지 떠올랐던 장면이 갑자기 흐려지고, 훅 꺼져버린 촛불처럼 기억이 탄 흔적만 남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묘한 안도감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잊는다는 것은 마치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천천히 떠밀려가는 조용한 강물과도 같다.

 

이 잊힘의 강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레테(Lethe)"라고 불렀다. 죽은 이들이 저승으로 향할 때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 물을 마시면 생전의 모든 기억을 잊고 새로운 영혼으로 태어나게 되는 장소. 그러나 나는 레테를 단순히 신화 속 강의 이름으로만 남겨두기보다  우리의 일상 깊숙이 배어 있는 조용한 망각의 흐름으로 바라보고 싶다. 

2. 망각의 물결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잊는다. 지하철에서 읽던 책 속 문장을 잊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영수증을 잃어버리고, 지나가듯 들은 노래 가사를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은 오래된 책장과 같아서 어떤 페이지는 얇아져 쉽게 찢어지고, 또 어떤 페이지는 묘하게 남아 계속해서 손에 닿는다.

 

레테는 신화 속 강이지만, 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자주 건너는 강이기도 하다. 깊은 밤 불을 끄고 누웠을 때 하루 동안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하나둘 사라져 어떤 것은 아침이면 끝내 모습을 잃는다. 그 과정은 고요하고 자연스럽다. 마치 꿈의 끝자락이 손에서 빠지며 흘러가는 것처럼.

 

대중예술에서도 이러한 사라짐은 늘 중요한 소재다. 영화 <메멘토> 속 주인공은 단편적인 기억만 남긴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의 삶은 기억이 아니라, 잊어버림이 구조를 만든다. 레테의 물을 마시고 살아가는 인간의 현대적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듯 망각의 물결은 우리 곁에 있다.

3. 기억의 여신과 망각의 강이 마주 보는 장면

흥미로운 것은, 레테가 ‘망각’을 뜻하는 강이면서도, 그 반대편에는 늘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두 존재는 서로 대칭을 이룬다. 기억과 망각. 떠오름과 사라짐. 불붙는 촛불과 꺼져가는 불씨. 우리는 이 둘의 사이에서 살아간다. 어떤 날은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해서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반대로 어떤 날은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려 허무해질 때가 있다.

 

레테는 기억을 적으로 두지 않는다. 그저 기억이 너무 무거워질 때, 인간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도록 만들어둔 완충 지대에 가깝다. 그러니 이 강은 잔혹함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균형의 상징이다.

4. 대중예술 속에서 되살아나는 레테의 흔적

레테는 이름 그대로 ‘잊어버림’을 상징하지만, 오히려 많은 작품에서는 이 망각의 순간이 사건을 움직이는 출발점이 된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속 희미해지는 공 상자들을 떠올려 보자. 기억 구슬이 옅어지며 사라지는 장면은 레테의 물결을 떠올리게 한다. 망각은 잔인하지만, 동시에 필요하다. 구슬이 사라지기에 새로운 감정이 들어올 자리도 생긴다.

 

드라마 <블랙 미러>에도 레테는 등장한다. 기억을 완벽하게 저장하는 기술이 등장하자, 오히려 인간은 더 괴로워진다. 레테가 사라진 세계는 너무 무겁다. 완전한 기억은 완전한 감옥이 된다. 망각은 결코 결핍이 아니라 인간성이 유지되는 조건이라는 사실을, 예술은 꾸준히 말하고 있다.

5. 왜 잊어야 하는가

어쩌면 이 질문이 레테가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기억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잊어버려야만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상처를 잊지 못하면 관계를 맺기 어렵고, 슬픔을 잊지 못하면 새로운 기쁨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실패를 잊지 못하면 다시 시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레테는 단지 죽은 자들이 건너는 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이 매일 조금씩 발끝을 적시는 강이다. 잊지 않았다면 버티기 힘든 순간을 부드럽게 덮어주는 얇은 물결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은 죽은 뒤 레테의 물을 마시고 모든 기억을 잊는다. 그렇게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이 설정을 단순한 환생 신화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인간이 끝없이 변하고 갱신된다는 사실을 은유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몇 번이고 작은 레테를 건너며 살아간다. 새로운 도시로 이사할 때나 오래된 관계를 정리할 때, 마음속 낡은 생각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레테의 강을 건너고, 이전의 나를 조금씩 잃어버린 채 다음 순간의 나로 살아간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가 우리를 붙잡는다면, 레테는 우리를 앞으로 밀어낸다. 둘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 균형 속에서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인간은 없다.

 

잊어버리는 인간은 다시 사랑하고, 다시 걷고, 다시 쓰고, 다시 살아간다. 레테는 잊힘 속에서 우리를 새로움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강이다. 그 강가에 서 있으면, 우리는 오래된 슬픔이 물결에 녹아 사라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잠시 후, 아주 작지만 새로운 파도 하나가 발목을 스친다. 그 파도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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