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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Yoo Young-kuk): 대지의 침묵과 하늘의 심연

by Godot82 2026.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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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Yoo Young-kuk
윤형근-Yoo Young-kuk

1. 대지의 침묵과 하늘의 심연이 만나는 문: 윤형근의 예술 세계를 거닐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목이자 단색화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윤형근(Yoo Young-kuk) 작가의 전시는 우리에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비우는 것'이 얼마나 웅숭깊은 행위인지를 묵직하게 질문한다. 20세기 한국의 질곡진 역사를 온몸으로 관통하며 그 고통을 예술적 숭고함으로 승화시킨 그의 작품들은, 자극적인 이미지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울림을 준다.

 

이제 PKM 갤러리에서 펼쳐질 그의 검은 문을 열고, 흙의 따스함과 하늘의 신비가 하나로 녹아든 그 깊은 심연 속으로 한 편의 수필 같은 여정을 시작해보려 한다.

2. 침묵을 그리는 수행자: 윤형근의 궤적

윤형근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딛고 서 있던 시대의 땅과 그가 바라보던 스승의 하늘을 먼저 보아야 한다. 1928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지점들을 모두 지나왔다. 일제강점기 말의 혼란, 한국전쟁 당시의 보도연맹 사건, 그리고 유신 체제 하에서의 부조리에 저항하다 겪은 네 번의 투옥과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경험은 그의 예술적 토양이 되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는 그의 스승이자 장인이었다. 김환기가 '하늘'을 닮은 푸른색으로 우주의 질서를 노래했다면, 윤형근은 그 하늘 아래 비참한 현실의 '땅'을 딛고 서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다. 1970년대 초,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뒤 그는 '천지문(天地門)'이라 불리는 자신만의 고유한 양식을 확립한다.

 

이후 200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오직 '천(Blue)'과 '지(Umber)'의 조화에 매달리며 전 세계적인 단색화 열풍의 중심에 섰다.

그의 삶은 분노와 슬픔을 거칠게 쏟아내는 대신, 그것을 삭이고 인내하여 가장 순수한 형태로 정제하는 과정이었다.

3. 단색화(Dansaekhwa): 비움으로써 채우는 명상의 예술

윤형근을 상징하는 가장 큰 범주는 **단색화(Dansaekhwa)**다. 이는 단순히 한 가지 색으로만 그린 그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적 뿌리와 반복적인 수행의 과정을 중시하는 독특한 추상 미술 조류를 일컫는다.

 

단색화 (Dansaekhwa)란 1970년대 한국에서 발생한 추상 미술의 한 갈래다. 작가의 수행적인 태도, 재료의 물성 강조, 그리고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정신성을 특징으로 한다.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궤를 같이하는 듯 보이지만, 훨씬 더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가치에 집중한다.

4. 청(Blue)과 엄버(Umber): 하늘과 땅이 만나는 찰나

윤형근의 그림은 언뜻 보면 검은색으로만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두 가지 근원적인 색이 섞여 있다. 그는 이를 **청색(Ultramarine)**과 **번트 엄버(Burnt Umber)**의 만남이라 불렀다. 엄버 (Umber)는 흙에서 추출한 산화철을 함유한 천연 안료다. 구운 정도에 따라 '번트 엄버'라 부르기도 하며, 깊고 어두운 갈색을 띤다. 땅의 원초적인 생명력과 진흙의 질감을 상징한다.

 

울트라마린 (Ultramarine)은 라틴어로 '바다 건너온'이라는 뜻을 지닌 깊은 푸른색 안료다. 고귀함과 하늘의 신비로움을 상징하며, 김환기 작가의 주된 색채이기도 했다. 윤형근은 이 두 가지 색을 섞어 '검정에 가까운 심연의 색'을 만들었다. 그는 이를 "하늘과 땅이 만나는 문"이라고 표현했다.

 

윤형근의 검정은 죽음처럼 닫힌 검정이 아니라, 대지의 따스함과 하늘의 광활함이 뒤섞인 생명의 검정이다. 

5. 번짐(Burim)과 스밈: 자연의 순리를 기다리는 손길

윤형근 작업의 가장 큰 묘미는 물감이 캔버스 위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번짐(Burim)**의 효과에 있다. 흰 도화지 위에 물방울이나 커피가 떨어졌을 때 그 가장자리가 부드럽게 퍼져 나가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윤형근은 마포(Hemp)나 면천 위에 테레핀유(기름)를 섞은 물감을 얹어, 그것이 천의 결을 따라 스며들고 번지기를 기다렸다.

 

그는 억지로 형태를 가두지 않고, 자연이 스스로 그림을 완성하도록 자리를 내어주었다. 일반적인 캔버스 대신 거친 **마포(Linen/Hemp)**를 즐겨 사용했다. 이는 재료 자체가 가진 성질, 즉 **물성(Materiality)**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일상에서 리넨 소재의 셔츠를 입을 때 그 거칠면서도 시원한 감촉을 느낀다. 합성 섬유가 줄 수 없는 자연스러운 주름과 질감이 주는 멋이다.

 

윤형근은 아무런 처리도 하지 않은 날것의 마포 위에 물감을 얹음으로써, 캔버스를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판이 아니라 대지의 일부로 격상시켰다. 이는 최근 트렌드인 **'내추럴 인테리어'**나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린 우드 가구가 주는 편안함과 맥을 같이 한다. 가공되지 않은 재료가 주는 진실함, 그것이 윤형근이 추구했던 예술의 품격이다.

6. 명상적 가치(Spirituality): 방탄소년단(BTS) RM이 매료된 이유

최근 윤형근 작가가 젊은 세대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게 된 계기 중 하나는 글로벌 아티스트 방탄소년단(BTS)의 RM이 그의 팬임을 자처하면서부터다. 왜 젊은 세대는 이 묵직하고 어두운 그림에 열광할까? 그것은 그의 작품이 가진 명상적 가치(Meditative Quality)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와 소음에 노출되어 있다. 자극적인 쇼츠 영상이나 화려한 CG가 가득한 블록버스터 영화 사이에서 지친 대중에게, 윤형근의 그림은 아무 말 없이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준다. 일상에서 우리가 ASMR을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키거나, 고요한 숲 속에서 '불멍'을 하며 생각을 비우는 행위와 같다.

 

그의 거대한 기둥 사이에 서면, 복잡했던 머릿속은 어느덧 고요해지고 오직 나 자신의 호흡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것은 한 장의 그림을 넘어, 영혼을 치유하는 공간적 경험이다.

7. PKM 갤러리의 검은 문을 넘어서

"내 그림은 잔소리를 다 뺀 것이다." 윤형근 작가는 인생의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결코 요란하게 자신의 고통을 떠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삼켜내어 가장 깊은 밤의 색으로 캔버스에 옮겼다. PKM 갤러리에서 마주할 그의 작품들은 당신에게 화려한 위로를 건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묵직한 검은 기둥 앞에 서는 순간, 당신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은 빛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빛을 품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우리가 딛고 서야 할 이 땅이 얼마나 단단하고 따뜻한지를 말이다. 바쁜 일상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삼청동의 고요한 화랑 안으로 발을 들여보길 권한다. 윤형근이 세워놓은 그 '천지문'을 통과할 때, 당신의 마음속에도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기적 같은 침묵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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