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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곳에서 오는 라디오 신호를 잡는 일: DXing(Distant Expedition)

by Godot82 2025.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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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Xing-Distant Expedition
DXing-Distant Expedition

1. DXing (Distant Expedition)

어린 시절, 나는 밤마다 작은 단파라디오 앞에 앉았다. 지금은 다들 잊고 지내는 싸구려 플라스틱 라디오는 미세한 잡음을 토해냈다. 그 잡음 속에서 간혹, 세계를 건너오는 목소리들이 들릴 때가 있었다. 영어인지 일본어인지 모를, 혹은 그 어디 중간쯤에 자리한 이상한 리듬의 언어들이 파도처럼 들락거렸다.

 

나중에서야 그 행위가 바로 DXing—‘Distant Expedition’, 멀리 있는 신호를 찾아 나서는 사소하지만 집요한 원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DXing는 귀의 모험이었다.

2. DXing이란 무엇인가: 긴 안테나를 든 탐험가

간단히 말해 DXing은 아주 먼 곳에서 오는 라디오 신호를 잡아내는 일이다. 그것은 대륙을 가로질러 넘어오는 희미한 주파수를 해독하려는 일종의 ‘청각적 탐험’이다. 복잡한 말 대신, 이렇게 생각해 보자. 당신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주 희미한 별 하나를 보는 순간, 당신은 그 빛이 수백 년 전 어딘가의 별 표면에서 방출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것이다.

 

DXing은 그와 같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온 흔적을 포착하는 행위, 그것도 눈이 아니라 귀로. DXer들은 흔히 더 좋은 안테나, 더 예민한 수신기, 더 적은 잡음을 꿈꾼다. 그러나 실은 기술보다 중요한 게 있다. 끈기다. 집요하고, 사소한 디테일에 매달리며, 무언가 불편하고 어둡고, 그러나 심하게 인간적인 열망이 들러붙어 있다.

 

신호가 잡힐 듯하다가 사라지고, 잡음은 늘 고집스럽게 들러붙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멀리 캐나다나 러시아의 방송국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한 조각이, 바다 건너 뉴스의 문장 하나가, 잡힌다. 그 순간을 위해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헤드폰을 쓰고 쉼 없이 다이얼을 돌린다.

3. 대중예술 속의 DXing: 영화와 음악이 알려주는 ‘먼 곳의 목소리’

DXing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감각은 이미 알고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우주 먼 곳의 신호를 해독하려고 헛된 듯 보이는 반복을 이어가던 장면이나 <컨택트>에서 주인공이 우주에서 도착한 기묘한 전파를 처음 발견하던 순간을 떠올려 보자. 이는 모두 DXing의 감정적 구조와 닮아 있다.

 

막연한 기다림, 설명할 수 없는 기대,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주어지는 낯선 소리의 충격.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었던 먼 나라 밴드의 노래 한 곡이 당신을 따라다닌 적은 없는가? 아무 맥락도 없이 흘러들어왔지만, 온몸이 그 시간을 기억하게 해 버리는 말하자면 청각적 운명 같은 것. DXing은 바로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진 취미다.

4. 기술적 설명을 덜어내고, 인간적인 욕망을 더하면

전문적인 언어를 쓰자면 DXing은 전리층의 반사, 대기권의 굴절, 주파수의 성질 같은 물리적 원리에 기반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들을 조심스럽게 뒤로 밀어 두고 싶다. 왜냐하면 그 설명은 정확하지만, 이 취미가 가진 감성의 절반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DXing은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편이 더 가깝다.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먼 곳의 미약한 신호를 기다리는 건, 어쩌면 자신이 세계와 아직 단절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다.” 잡음 속에 숨어 있는 작은 목소리를 찾겠다는 마음은,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무언가’를 향한 갈망이지 않을까.

 

단파라디오를 붙잡고 먼 신호를 잡는다는 것은, 나는 아직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5. 라디오라는 오래된 매체—그리고 우리가 잃어가는 감각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즉시 찾아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원한다면 그 자리에서 검색하고, 동영상을 틀고, 번역도 붙인다. 그러나 DXing은 정반대다. 느리고, 불확실하며, 때로는 실패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 행위는 현대인의 감각을 새롭게 벼리는 도구가 된다.

 

기다림의 기술, 포기하지 않는 집중, 우연을 받아들이는 여유. 이 세 가지는 DXer들에게 익숙한 덕목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잃어버린 감각들이다. 어쩌면 그건 사랑을 기다리는 일과도 닮았다. 신호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기대하면 실망도 한다. 그러나 어느 날 뜻밖의 순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잡힌다. 그때 우리는, 아마도, 살아 있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될 수도 있다.

6. 우리는 어디를 향해 귀를 기울이는가

DXing은 단순히 취미가 아니라, 청각을 매개로 한 자아 탐구에 가깝다. 잡음 속에 숨어 있는 미약한 천상의 목소리를 찾아내듯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잡음 사이에서 중요한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 누군가의 진심, 혹은 스스로의 진실을 구별하는 일과도 닮았다.

 

그렇기에 DXing은, 이상할 만큼 인문학적인 취미다. 기술과 인간, 물리와 감성, 기계와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7. 마지막 신호

지금도 나는 가끔 오래된 단파라디오를 꺼내고, 안테나를 세우며, 세상이 조용해지는 새벽녘에 귀를 기울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외국어의 단편들, 음악인지 광고인지 모를 가냘픈 음절들, 그리고 그 사이를 빈틈없이 채우는 잡음. 모든 것이 뒤섞인 그 지층 속에서 문득, 단단하게 박힌 하나의 신호가 드러나는 순간을 기다린다.

 

세계는 여전히 잡음으로 가득하지만, 그 잡음 속에서 누군가의 신호는 분명히 건너오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다시 한번 귀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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