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둔마 (鈍麻, blunting / dulling)
둔마란 감정이나 감각, 반응이 비정상적으로 무뎌진 상태를 의미한다. 주로 정서 둔마(affective blunting) 혹은 정서 반응 둔마(emotional blunting)라는 표현으로 많이 쓰이는데, 기쁜 일에도 별 감정이 없거나 슬픈 일에도 눈물 한 방울 없이 무덤덤하거나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등 스스로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감정이 사라진 느낌을 호소하기도 하는 등의 특징이 나타난다.
2. 정서 둔마
상담심리학에서는 정서 둔마가 자기 보호를 위한 무의식적 방어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고도 본다. 즉, 감정적으로 너무 고통스럽거나 위협적인 경험을 처리하지 못할 때, 그 감정을 무디게 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심리적 전략인 셈이다.
예를 들어, 어릴 때 학대를 겪은 사람이 이후 감정을 거의 표현하지 않고 “나는 아무 느낌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경우, 상실이나 트라우마 직후 아무 감정이 없거나, 웃기까지 하는 경우, 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료진이 너무 많은 죽음을 겪으면서 감정 반응이 점점 줄어드는 경우 등이 있다.
이런 ‘둔마’는 단순한 감정 부족이 아니라, 때로는 지나치게 감정을 느꼈기 때문에 무뎌진 상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정서 둔마(affective blunting)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서 섣불리 단순히 감정을 “느끼라”거나 “표현하라”는 말을 적절치 못하다. 왜냐하면 정서 둔마는 대부분 심리적 외상이나 감정적 과부하에 대한 무의식적 자기 보호 전략이기 때문이다.
즉, 감정을 억누르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느끼는 능력 자체가 차단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해소 역시 조심스럽고 점진적인 복원 과정이 필요하다.
3. 회복하려면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서 둔마의 원인부터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적인 진단과 평가를 통해 뿌리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원인을 파악했다면 실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매일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기록하거나 말로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감정은 '느낌'이기 전에 '언어화'되어야 비로소 자각되기 때문이다.
몸을 통해 감정을 불러오는 감각 자극 훈련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천천히 걸으며 풍경을 바라보거나 아로마 향기를 맡거나 점토나 모래, 천 등 다양한 질감을 손으로 만지는 감각 자극 훈련은 감정 회복의 가장 원초적인 통로일 수 있다.
정서 둔마 상태의 사람은 누구에게도 감정을 드러낼 수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하지 않고, 감정을 요구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계가 필요하다. 상담사와의 관계나 반려동물과의 관계 맺기 등 극도로 안정적인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감정은 관계 속에서 안전하다고 느낄 때 조금씩 복원된다.
전문가에게 전문 심리치료를 받거나 필요한 경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의 상담을 통해 약물을 복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상담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 정서 둔마는 "고장"이 아니라, 과거의 생존 전략이 지금도 작동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 전략을 완전히 걷어내려면,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안전하다고 몸과 마음이 스스로 납득해야 한다.
둔마는 감정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감정을 지켜낸 방식인지도 모른다. 무감각은 무너짐이 아니라, 살아남음의 다른 얼굴인 것이다. 그것을 너무 빨리 치유하려 하지 말고, 느껴지는 만큼만 천천히 되돌아보는 것, 그게 회복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