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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잡음 속에서 온다: 단파(SW, Shortwave) 라디오

by Godot82 2025.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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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파_SW_Shortwave
단파_SW_Shortwave

 

1. 단파 (SW, Shortwave) 라디오

낡았지만 기능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품게 되는 물건. 단파라디오는 그런 물건이다.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지만, 한때 우리는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전파 속에서 세계를 들었다. 단파라디오는 그 공기 속의 길, 먼 곳에서 날아온 목소리들이 좁은 금속 통 속으로 모여드는 기묘한 통로였다.

 

단파라는 말은 ‘파장이 짧은 전파’라는 뜻이다. 파장은 물결 하나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의 길이를 말하는데, 이 길이가 짧을수록 더 높은 주파수를 갖는다. 그런데 짧은 파장은 특이한 성질이 있다. 지구 대기권의 전리층에 부딪히면 반사된다. 마치 너무 잘 튕겨 올라가는 농구공처럼, 전리층은 단파를 다시 지구 쪽으로 내려보낸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단파는 지구를 여러 번 돌 수도 있다.

 

그래서 단파 방송은 국경을 훌쩍 넘고 바다를 건너 먼 나라까지 도달한다. 전파가 기적을 만드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1970~80년대 유럽의 젊은 청년들이 라디오를 통해 미국의 록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원리였다. 단파(SW, Shortwave)란 파장이 짧아 전리층에 반사되며 지구 반대편까지 도달할 수 있는 전파이다. 

2. 밤에 더 잘 들리는 것들

단파는 밤에 더 잘 잡힌다. 밤이 되면 태양 복사 활동이 줄어들어 전리층의 밀도와 구조가 달라지고, 단파가 반사되기 좋은 상태가 된다. 그런데 이런 설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밤이라는 환경이 단파라디오를 듣는 경험을 완전히 바꾼다는 사실이다. 어둠 속에서 라디오를 켜면, 아주 오래전 살던 집의 냄새까지 떠오른다.

 

라디오 다이얼을 조금씩 돌릴 때 생기는 지지직— 하는 잡음, 그리고 예기치 않게 들려오는 모스부호 같은 신호음, 알 수 없는 언어로 누군가 읽어 내려가는 뉴스나 성경 구절. 그 모든 순간이 마치 카버의 단편 속에서 한 남자가 갑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채 부엌 의자에 앉아 라디오를 듣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말은 모호하고 흐릿하지만 정작 나에게만 또렷하게 와닿는다.

 

단파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소리를 실어 보낸다. 나와 상관없는 세계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내 방 안으로 들어와 앉는다. 그리고 나는 잠시, 내가 아닌 누군가의 시간 속에 산다.

3. 세계는 잡음 속에서 온다

대중예술 속에서도 단파라디오는 종종 중요한 장치였다. 예를 들어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쿠퍼는 모스부호로 보내온 미세한 중력 흔들림을 해석하며 우주의 메시지를 들었다. 그 장면에서 라디오와 전파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문턱 너머 세계에 손을 뻗게 해주는 감각 기관이었다.

 

또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도, 시간과 공간이 어긋난 두 사람이 연결된 것은 미세한 파열, 잡음 같은 순간들이었다. 말로 명확히 설명될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디선가 누군가의 기척이 생생하게 감지되는 감정. 단파라디오는 바로 그 감각에 가까운 기술이다.

 

세상은 가끔 잡음의 형태로 다가온다. 모든 것이 또렷하게 들리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말이 무엇인지 다 알아듣지 못해도, 단파라디오의 흐릿한 신호처럼 ‘전해짐’ 그 자체가 의미가 될 때가 있다.

4. 희미해질수록 선명해지는 것들

나는 종종 단파라디오를 ‘희미한 기술’이라고 부른다. 신호는 약하고, 잡음은 거칠고, 음질은 스마트폰의 맑은 스트리밍과 비교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희미함 속에서 오히려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듣는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가 정확한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든가, 문장 끝이 이상하게 길어진다든가 하는 작은 흔들림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읽어내듯이.

 

단파라디오는 세계의 그런 떨림을 들려준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나라의 날씨, 정세, 여행자들의 SOS 신호, 심지어는 은밀한 정보들이 잡음과 함께 넘어온다. 물론, 지금은 누구나 주머니 속에 세계와 연결된 작은 컴퓨터를 들고 다닌다. 단파라디오는 조용히 뒤편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남긴 의미는 아직 살아 있다.

 

단파의 세계는 말해준다. “세계는 여전히 무수한 신호 속에서 서로를 향해 길을 찾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신호를 들을 수도, 무시할 수도 있다. 다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너무 잘 들리는 세계 속에서, 혹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희미하게 들려오던, 그러나 묘하게 마음을 잡아끌던 먼 곳의 목소리들 말이다.

 

단파라디오는 여전히 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오가며 누군가의 방 안에 가만히 도착한다. 우리가 그 소리를 듣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단파라는 기술은, 우리가 살며 느끼는 상실과 희망, 연결과 단절의 감각을 가장 정확하게 닮은 기술일지도 모른다. 희미하지만, 끝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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