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에 앞서
이 책은 팟캐스트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를 통해 알게 됐다. 제목 자체가 워낙 강렬하게 다가와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이었다. 제목이 품은 함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왜 정희진 작가가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책이라는 서평을 썼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고민 없이 구매했고, 쉬지 않고 한 번에 읽었다.
2. 제목이 내용이다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제목 자체가 전체 내용을 관통하고 있었다. 책 표지에 인쇄된 제목을 다시 한번 봤다.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죽은 유대인과 죽은 약자만을 숭배하고 소비하고 장식하는 데만 정신을 빼앗긴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고발하는 셈이었다.
3.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사회적 약자에게 큰 관심이 없다. 아니다. 살아있는 약자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들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순간은 오직 그들이 죽었을 때 뿐이다. 물론, 그 관심조차 자기중심적이다. 약자들이 살아오며 겪었을 무수한 고통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들의 죽음만이 사건이 된다.
개인적인 비극 혹은 시스템의 부재, 더 나아가 인간성 말살의 징조니 위기니 떠들어대며 반성하고 애도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무감각한 대중들 속에서 그래도 나는 의식 있고 올바른 인간이라는 애티튜드를 뽐내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댄디하지만 다소 밋밋한 옷차림에 화룡점정이 되길 기대하며 꽂는 브로치랄까. 그렇게 사회적 약자들은 장식, 장신구처럼 소비된다.
4. 사람들은 왜 죽은 유대인을 사랑할까
내 생각은 그렇다. 앞서 말했듯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이 없다. 조금 더 솔직한 생각을 말하자면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무슨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되는 듯 슬슬 뒷걸음질 치며 멀어진다. 사회적 약자가 될까 봐 두려워하고 급기야 혐오한다.
그렇게 사회적 약자들은 점점 수도권 밖으로 밀려나 뿔뿔이 흩어지고 고립되어 여러 방식으로 죽는다. 그리고 죽어야만 사건이라도 된다. 물론, 모든 사회적 약자의 죽음이 주목할 만한 사건이 되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시기에 활용될 만한 사건이어야 한다. 대체 누가 그들의 죽음을 이용하여 사회적 약자의 죽음을 인류의 보편적인 경험인 것처럼 희석해 버리는 걸까.
이 책은 그런 것들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풀어놓고, 또 다른 문제들도 제기한다.
5. 살아있는 약자들을 생각하며
책을 읽으면서 여러 참사가 떠올랐다.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사회. 실망을 넘어 좌절과 분노만을 심어주는 사회. 타인의 슬픔을 조롱하고 난도질하고 지겹다고 그만하자고 말하는 사회. 분노가 좌절로 좌절이 슬픔으로 슬픔이 무력감으로 점점 바래가고, 그 핑계로 그들에게 무관심해진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특히, 본문 287쪽에 '홀로코스트에 못 미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홀로코스트는 아니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꽤 무거운 충격을 받았다. 엄청난 통찰력이 응집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에서 해설에 이르기까지 나에겐 버릴 부분이 없는 책이었다.
부디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모두가 읽는다면 세상이 지금과는 좀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