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항등성
어떤 개념들은 처음 들으면 아리송하다. ‘항등성’이라는 말도 그렇다. 하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여 보면 이 단어는 우리 모두가 매일 아주 친밀하게 쓰고 있는 세계의 법칙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있어도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어떤 원칙이다. 평범한 삶에 갑자기 도착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항등성은 그렇게 우리 곁에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2. “아무리 달라 보여도 결국 너는 너다”의 법칙
우리가 쓰는 숫자나 문장, 혹은 사물들은 여러 형태로 바뀌어도 여전히 같은 의미를 지닐 때가 있다. 그 ‘의미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 바로 항등성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마트에 가서 우유를 산다고 치자. 우유 팩의 겉모습은 바뀔 수도 있고, 브랜드가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유라는 물건 자체의 역할과 의미는 그대로다. 그것이 항등성의 기본적인 감각이다.
조금 다른 예도 있다. 영화 <토이 스토리>에서 버즈는 처음에 자신이 진짜 우주전사라고 믿는다. 하지만 관객은 알고 있다. 버즈가 어떤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든, 결국 그는 장난감 버즈라는 항등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이때 항등성은 "정체성(identity)"과는 살짝 다르다. 정체성은 흔들리고 변하지만, 항등성은 그 흔들림 속에서도 끝내 남아 있는 본래의 구조를 말한다.
3. 항등성은 수학이 아닌 우리 일상의 운영 체계다
사람들은 종종 항등성을 수학이나 논리학 같은 이론적 세계에만 존재하는 개념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항등성은 우리의 일상에서 무언가가 ‘계속해서 그 자체임을 유지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아이에게 매일 밤 같은 동화를 읽어주는 부모를 떠올려보자.
비록 목소리는 날마다 다르게 떨리고, 아이는 어제와 다른 질문을 던지며, 방 안의 공기는 늘 조금씩 다른 냄새를 풍기지만 동화 속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 그 세계가 유지되는 이유가 바로 항등성이다. 예를 들어, 스티븐 킹의 소설에 나오는 마을들도 마찬가지다. 『미저리』나『살렘스 롯』에서 어떤 공포가 찾아오든 그 마을의 구조는 늘 유지된다.
오래된 목재 냄새가 배어 있는 현관들, 얇은 안개가 아침마다 내려앉는 도로들, 손님이 많지 않은 식당. 공포가 이 세계를 뒤흔들어도, 어떤 틀은 고집스럽게 남아 있다. 그것이 무너진 순간 이야기는 비극이 되고, 유지되는 순간 이야기는 세계를 버텨낸다. 항등성은 바로 그 버티는 힘의 개념이다.
4. 대중예술 속 항등성
항등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술적 사례는, 이상할 정도로 영화와 드라마 속 ‘영웅’들이다. 슈퍼맨이 아무리 고뇌해도, 아무리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내도, 그가 슈퍼맨이라는 항등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브루스 웨인이 방황하고 절망해도, 그는 여전히 배트맨이다. 엘사가 얼음을 마음대로 다루는 능력을 숨기거나 드러내거나, 그녀는 여전히 엘사다.
이것들은 정체성(identity)의 변주가 아니다.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가’를 매일 새롭게 묻는 흔들리는 질문이지만, 항등성은 그 흔들림 사이에서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핵심 구조를 뜻한다. 팔이 조금 길어졌든, 머리 모양이 바뀌었든, 번역판 제목이 달라졌든, 해리 포터는 여전히 해리 포터이듯 말이다.
대중예술은 이 단순한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우리가 무리 없이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는 이유는 줄거리 때문만은 아니다. 변하지 않는 ‘항등의 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5. 항등성은 ‘진짜 나’를 찾는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는 항등성을 ‘본모습’이나 ‘진짜 나’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항등성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진짜 나’라는 말은 너무 철학적이거나, 혹은 심리학적이다. 항등성은 훨씬 더 구조적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동네 서점에 매일 가던 시절을 떠올려보자. 그 서점은 간판이 바뀌기도 했고, 사장님이 바뀌기도 했지만, 그 서점은 여전히 당신이 책 냄새를 맡으며 시간을 보내던 바로 그곳이다.
변화와 교체와 재정비 속에서도 ‘서점’이라는 항등성은 유지되고 있다. 그처럼 항등성은 "내가 누구인가"보다 "무엇이 무엇으로 남아 있는가"를 설명한다.
6. 변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
항등성이 무너질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늘 같아야 하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같지 않을 때. 문이 항상 저절로 닫히던 집이 갑자기 안 닫힌다든가, 하루도 빠짐없이 켜지던 가로등이 갑자기 깜빡인다든가. 이런 일들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항등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 <겟 아웃>에서 주인공이 처음 느끼는 불안은 흑인으로서의 신체적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사람이라는 항등성이 유지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몸은 그대로인데, 그 안의 ‘나’가 다른 무언가로 바뀔 수도 있다는 두려움. 항등성이란 이렇게 단단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이미 금이 가 있기 마련이다.
7. 변하지 않아 줘서 고마운 것들
그러나 항등성은 공포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어떤 위안이 되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빵집이 여전히 같은 냄새를 풍길 때,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웃을 때, 오래된 노래의 첫 소절이 변함없는 기쁨으로 귀에 들어올 때, 그 모든 순간은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다는 다정한 증거가 된다.
항등성은 우리가 세계와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적이고 은밀한 끈이다. 그 끈 덕분에 우리는 변해가는 세계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항등성은 거창한 개념처럼 보여도 사실은 매일의 숨결처럼 가까이 있다. 우리가 물건을 알아보고, 사람을 기억하고,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지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 덕분이다.
공포든 사랑이든, 삶의 파국이든, 그 밑바닥에는 늘 어떤 항등성이 남아 있다. 그 항등성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완전히 길을 잃는다. 항등성은 이렇게 우리 삶을 붙들고 있는 보이지 않는 뼈대다. 흔들리고, 때로는 금이 가도, 끝까지 남아 있는 그 뼈대. 우리는 그 위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세계를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