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빚진 삶의 초상화, <파산의 기술記述>

by Godot82 2025. 5. 16.
반응형

파산의 기술記述-The Description Of Bankruptcy-이강현
파산의 기술記述-The Description Of Bankruptcy-이강현

 

1. 파산의 기술記述 (The Description Of Bankruptcy)

‘띠띠, 삐빅’ 하고 울리는 지하철 개찰구 소리, 뉴스 앵커의 무심한 목소리, 전봇대에 붙은 채무자 추심 안내 방송.

영화 《파산의 기술記述》(2006)은 그렇게 시작된다. 줄거리라고 할 것도 없다. 대신 반복되는 장면들이 있다. 비워진 냉장고, 택배도 끊긴 우편함, 정전된 집안에서 라면 봉지를 부스럭거리며 뜯는 소리. 이강현 감독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파산’을 다룬다. 법적 용어로써의 파산이 아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허벅지가 무겁고, 이마에 자꾸만 땀이 나는 그런 순간들. 

 

그러니까 이건, 아주 일상적인 파산의 기술에 관한 기록이다.

2. 줄거리

2006년. 한국 사회는 IMF 외환위기를 겪은 지 불과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부채는 말 그대로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신용불량자’라는 말이 집집마다 들렀다 갔다. 서울의 어느 아파트에서는 아버지가 가족을 남긴 채 사라졌고, 편의점 유리창에는 “월세 낼 사람 급구”라는 종이가 붙었다. 그 시절은 그랬다. 직장은 없어도, 신용카드는 있었다.

《파산의 기술記述》은 이러한 시대의 공기를 그대로 집어온다. 배우도 없다. 설명도 없다. 다만 라디오 사연, CCTV 영상, 뉴스 클립, 그리고 판사들이 읽는 판결문이 교차하며 떠돈다. 그것들이 모이고, 겹치고, 부딪히며 점점 선명해진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서 무너지고 있는가?

 

이 영화에는 전통적인 ‘등장인물’이 없다. 관찰자 시점이다. 그 시점은 때로 텅 빈 식탁에, 때로는 수도가 끊긴 욕실에 머문다. 우리는 그 공간을 바라본다.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듯이. 감독 이강현은 영화 속에서 목소리를 낮춘다. 그가 직접 읽는 내레이션은 거의 무표정에 가깝다. 

3. 마치며

기술(技術)’이 아닌 ‘기술(記述)’이라는 제목 속 한자는 함정 같다. 무언가를 정교하게 만드는 노하우가 아니라, 이미 부서진 것을 적어두는 기록.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파산은 숫자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냉장고 속이 비어 있는 것이고, 창문 커튼이 안에서만 걸려 있는 것이며, 전화벨이 하루 종일 울리지 않는 일상이다. 그런 것들이 쌓이면, 사람은 기꺼이 사라지려 한다. 2000년대 중반, 한국 독립다큐멘터리는 노동, 빈곤, 젠더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었다. 

그 가운데 《파산의 기술記述》은 목소리를 낮추는 방식으로 파열을 일으켰다. 시끄럽지 않지만 잊히지 않는 영화. 대사 없이도 명확한 감정. 이 영화는 아무도 울지 않는다. 아무도 ‘이건 억울하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그냥 누군가는 마트에 가지 못하고, 누군가는 전화를 끊고, 누군가는 연체된 전기요금을 말없이 바라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는 끝내 감정을 남긴다. 사라지는 사람들의 얼굴 없는 슬픔이,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 파산은 숫자나 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온기와 무관심 사이에서 생겨나는 틈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