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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 아닌 것들의 고고학: 우리 삶이 아카이브가 되는 순간

by Godot82 2026.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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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_Archive
아카이브_Archive

 

1. 아카이브(Archive) 별것 아닌 것들의 고고학: 우리 삶이 아카이브가 되는 순간

창밖으로 겨울 해가 낮게 깔린다. 책상 위에는 읽다 만 영시 집과 정리가 안 된 사진 몇 장, 그리고 미지근해진 커피 한 잔이 놓여 있다. 세상을 관찰하며 깨달은 것은, 세상은 거대한 도서관이라기보다 차라리 누군가 급하게 떠나며 남긴 '어질러진 방'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흔히 사람들은 '아카이브(Archive)'라는 단어를 들으면 국가 기록원이나 박물관의 먼지 쌓인 수납장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아카이브는 생각보다 훨씬 가깝고, 건조하며, 때로는 뜨거운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서랍 속에 있는, 버리지 못한 영수증 뭉치 같은 것이다. 혹은 헤어진 연인이 남기고 간 오래된 티셔츠 같은 것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것들이 모여 당신이 누구인지 말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아카이브라고 부른다.

2. 낡은 상자 속에 갇힌 시간: 선택과 배제의 논리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수집한다. 어릴 적 모았던 우표, 여행지에서 가져온 리플릿, 혹은 스마트폰 갤러리에 쌓인 수만 장의 사진들. 하지만 단순히 모으는 것만으로는 아카이브가 되지 않는다. 아카이브의 핵심은 '선택'에 있다.

 

영화 <하이 피델리티>의 주인공 롭을 생각해 보자. 그는 자신의 레코드판을 연대순이나 알파벳순이 아니라, '자신이 상처받았던 이별의 순서'대로 정리한다. 이것이 바로 아카이브의 시작이다. 무질서한 과거의 파편들 중에서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버릴지 결정하는 순간, 그리고 그것에 자신만의 '질서'를 부여하는 순간, 사물은 역사가 된다.

 

전문적인 용어로 이를 '구조화'라고 부른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김치냉장고 안에 식재료를 분류해 넣는 기준이나, 메일함의 스팸 메일을 걸러내는 당신의 기준이 바로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체계'의 축소판이다. 무엇이 기억될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본래 힘을 가진 자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아카이브는 거창한 유물이 아니라, 버려진 구두 한 짝, 익명의 편지 한 통에 주목한다. 소외된 것들을 다시 선택해 질서를 부여하는 일, 그것이 아카이브가 가진 첫 번째 힘이다

3. 플레이리스트라는 이름의 자서전: 디지털 데이터의 수행성

요즘 우리는 누구나 아카이브를 만들며 산다. 대표적인 예가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나 '음악 스트리밍 앱의 목록'이다. 당신이 비 오는 날 듣기 위해 모아놓은 노래들은 단순한 음악 목록이 아니다. 그것은 그 음악을 듣던 당시의 공기, 습도, 당신의 감정을 박제해 놓은 공간이다.

 

여기서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말이 조금 어렵지만, 쉽게 말해 우리가 어떤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특정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을 뜻한다. 당신이 매일 아침 SNS에 마시는 커피 사진을 올린다면, 그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당신을 '커피를 즐기는 도시인'이라는 존재로 조각해 나가는 과정이다.

 

아카이브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벌이는 '현재 진행형의 퍼포먼스'다. 알고리즘이 당신의 시청 기록을 분석해 콘텐츠를 제안할 때, 그들은 당신이 만든 아카이브를 토대로 당신이라는 인간의 구조를 해킹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남긴 디지털 발자국들은 하나하나 모여 거대한 나의 초상화를 완성한다

4. 몸이 기억하는 기록: 텍스트 너머의 아카이브

무용수들의 몸을 관찰한다. 그들의 근육과 흉터는 그 자체로 훌륭한 아카이브다. 수만 번의 연습이 새겨진 발바닥의 굳은살은 어떤 문서보다 정직한 기록이다. 현대미술은 이제 종이 뭉치를 넘어 '몸'과 '소리'를 아카이브 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떤 예술가는 사람들이 시장에서 흥정하는 소리, 지하철의 소음만을 모아 전시한다. 이것을 '사운드 아카이브'라고 한다.

 

우리가 영화 <기생충>을 볼 때, 그 집의 냄새를 상상하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냄새와 소리, 감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의 구조를 지탱하는 강력한 데이터들이다.

5. 유목민의 서재: 장르를 가로지르는 담론의 그물망

아카이브는 고정된 창고가 아니라, 이 장르와 저 장르를 잇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사진작가들이 찍은 수만 장의 사진 속에서 우리는 당시의 패션(사회학), 구도(미술), 그리고 그 속의 인물들이 나누었을 법한 대화(텍스트)를 읽어낸다. 이것은 마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같다.

 

수많은 멀티버스 속의 '나'들이 한데 모여 혼란을 빚지만, 결국 그 모든 조각이 모여 하나의 서사를 완성한다. 현대 예술가가 하는 일도 이와 같다. 흩어진 데이터들을 수집하고, 그것들을 가로질러 새로운 의미의 그물을 짜는 것이다. 우리는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유목민처럼 웹 서핑을 하고, 미술관을 거닐고, 음악을 듣는다.

 

그 과정에서 수집된 파편들이 서로 충돌하고 화해하며 새로운 담론, 즉 새로운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낸다. 아카이브는 닫힌 결말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계속해서 다시 읽히기를 기다리는 열린 책과 같다

6. 기억의 윤리: 무엇을 남길 것인가

마지막으로, 아카이브는 '책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무엇을 저장하고 무엇을 삭제하느냐에 따라 미래 세대가 기억할 '오늘'이 결정된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빵집 주인이 따뜻한 빵을 건네며 위로를 건네는 장면이 있다.

 

아카이브는 때로 상처 입은 사회를 치유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재난의 기록을 모으고,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녹음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자료 수집이 아니라, 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각인시키는 사회적 실천이다. 웹 세상의 데이터는 영원할 것 같지만 의외로 취약하다. 링크는 깨지고 서버는 닫힌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록하고, 다시 배치해야 한다. 그것이 유목민처럼 떠도는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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