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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에서의 창조는 없다: '비독창성'(Unoriginality)이라는 역설의 미학

by Godot82 2026.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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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독창성-Unoriginality-Unoriginality
비독창성-Unoriginality-Unoriginality

 

1. 무(無)에서의 창조는 없다: 비독창성의 정의

우리는 흔히 천재적인 예술가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캔버스 위에 신의 계시처럼 새로운 형상을 그려낸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대 예술 철학은 이를 부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비독창성(Unoriginality)**이라는 낯선 개념과 마주하게 된다.

 

비독창성 (Unoriginality)이란 창작물이 완전히 새로운 것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텍스트, 이미지, 아이디어들을 재조합하고 변형하며 인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개념이다. 영어로는 'Unoriginality'라고 하며, 창조적 행위가 실제로는 '편집'과 '재구성'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매일 차려 먹는 밥상을 생각해보라. 오늘 내가 만든 '신메뉴'는 사실 어머니로부터 배운 요리법, TV에서 본 셰프의 비결, 그리고 냉장고에 남은 재료들이 뒤섞인 결과물이다. 완전히 세상에 없던 식재료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익숙한 재료들의 조합을 살짝 바꾼 것뿐이다.

 

영화 **<스타워즈>**를 떠올려볼 수 있다. 조지 루카스는 이 위대한 우주 서사시를 만들면서 고대 신화의 영웅 서사,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 그리고 서부극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와 우주라는 배경에 '편집'해 넣었다. 우리가 열광한 그 독창적인 우주는 사실 지극히 진부한 옛이야기들의 집합체였던 셈이다.

2. 거대한 그물망 속에 놓인 우리: 상호텍스트성

내가 쓴 글이 사실은 수만 권의 다른 책들과 연결되어 있다면 어떨까? 비독창성의 핵심에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라는 원리가 흐르고 있다. 상호텍스트성 (Intertextuality)은 모든 텍스트(글, 이미지, 영상 등)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다른 텍스트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 현상을 말한다. 영어로는 'Intertextuality'라 하며, 하나의 작품은 다른 작품들을 인용하거나 참고하여 만들어진 '모자이크'와 같다는 뜻이다.

 

일상의 예로, 친구와의 대화를 떠올려보자. 우리가 쓰는 신조어나 유행어는 사실 유튜브나 커뮤니티에서 본 것들을 서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내 것이 된다. 나의 말은 타인의 말과 섞여 있는 거대한 그물망의 일부다. 대중예술 속에서는 드라마 **<도깨비>**와 같은 판타지물을 들 수 있다.

 

드라마 **<도깨비>**는  한국의 전통 설화라는 오래된 텍스트와 현대의 로맨틱 코미디라는 형식을 섞어 새로운 맥락을 만든다. 시청자는 과거의 설화를 알기에 현재의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결국 독창성이란 아무도 모르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것들을 얼마나 절묘하게 '연결'하느냐의 문제다.

3. 익숙함이 주는 편안한 약속: 클리셰의 재발견

비독창성을 논할 때 가장 많이 비난받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클리셰(Cliché)**다. 흔히 '진부한 표현'이라 부르는 이것이 사실은 창작의 든든한 뼈대가 된다. 우리가 로맨스 영화를 볼 때, 남녀 주인공이 처음에는 티격태격하다가 비 오는 날 우연히 한 우산을 쓰게 될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클리셰의 예다. 뻔하지만 그 장면이 나오지 않으면 왠지 허전함을 느낀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영웅 영화들을 보라. 위기에 빠진 영웅이 각성하여 적을 물리친다는 지극히 클리셰적인 구조를 따르지만, 우리는 매번 그 익숙한 영웅 서사에 열광한다. 클리셰는 창작자와 관객 사이의 '약속'이며, 이 진부한 약속이 있기에 우리는 작품의 세계관으로 더 쉽게 빠져들 수 있다.

4. 낯설게 하기: 진부함에 생명을 불어넣는 마법

비독창적인 재료들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그 해답은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는 기법에 있다. 낯설게 하기 (Defamiliarization)는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 이론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가 제안한 개념이다. 일상적이고 진부해서 무심코 지나치는 사물이나 현상을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관람객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는 예술적 기법을 말한다. 영어로는 'Defamiliarization' 또는 'Ostranenie'라고 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매일 보는 집 앞 가로수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화가가 그 나무를 아주 기괴한 각도나 강렬한 형광색으로 그려낸다면, 우리는 비로소 그 나무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한다. 대중예술 중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는 우리가 흔히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라는 진부한 소재에 '인간이 없을 때 움직인다'는 설정을 더해 완전히 낯선 감동을 주었다. 익숙한 재료를 낯선 방식으로 배치하는 것, 그것이 비독창적인 세상에서 독창성을 획득하는 가장 영리한 방법이다.

5. 아카이브의 시대: 창작자는 이제 수집가이자 편집자다

현대 예술가들은 이제 무언가를 새로 만들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모으는 데 집중한다. 이를 **아카이브(Archive)**적 접근이라 부른다. 아카이브 (Archive)란 본래 기록 보관소를 뜻하지만, 예술에서는 방대한 양의 기존 데이터, 이미지, 오브제들을 수집하고 이를 특정한 맥락에 따라 재배열하는 창작 방식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Archive'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인스타그램의 '피드'나 핀터레스트의 '보드'가 일종의 개인 아카이브다. 내가 직접 찍은 사진뿐만 아니라 타인의 사진을 스크랩하며 나만의 취향을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창작이 된다. 대중예술 속에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아카이브형 감독의 전형이다.

 

그의 영화 **<킬 빌>**은 과거 홍콩 무협 영화, 이탈리아 스파게티 웨스턴, 일본 애니메이션의 조각들을 수집하여 거대한 아카이브처럼 펼쳐놓는다. 그는 새로운 이야기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 진부한 영화들의 기록을 가장 세련되게 '큐레이팅'한 편집자인 셈이다.

6. 포스트모더니즘과 모사: 원본 없는 복제의 바다

비독창성 담론의 철학적 뿌리에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과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있다. 시뮬라크르 (Simulacre)는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사용한 개념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든 복사물을 뜻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원본보다 더 실제 같은 복제물이 넘쳐나며, 원본과 복제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 영어로도 'Simulacre'라 한다.

 

일상의 예로, 우리가 테마파크에서 보는 '가짜 에펠탑'을 생각해보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프랑스에 있는 실제 에펠탑보다 테마파크의 에펠탑이 더 친숙하고 실제적인 경험이 된다. 대중예술 중 영화 **<매트릭스>**는 우리가 사는 현실 자체가 거대한 시뮬라크르, 즉 복제된 가상 세계임을 보여준다. 비독창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예술은 원본(진리)을 흉내 내는 복제의 복제일 뿐이지만, 그 복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균열이 새로운 미학을 만들어낸다.

7. 패러디와 패스티시: 조롱과 오마주 사이의 줄타기

비독창성을 가장 대중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바로 **패러디(Parody)**와 **패스티시(Pastiche)**다. 패러디는 특정 작품의 문체를 흉내 내어 풍자하거나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것이고, 패스티시는 풍자의 의도 없이 원작의 스타일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혼합하는 기법을 뜻한다. 우리말로 '혼성모방'이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Parody'와 'Pastiche'라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유행하는 밈(Meme)을 따라 하거나 연예인의 성대모사를 하는 것은 패러디에 가깝다. 대중예술 속 드라마 **<멜로가 체질>**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클리셰(진부한 설정)를 패러디하며 시청자에게 즐거움을 준다. 반면 영화 **<라라랜드>**는 고전 뮤지컬 영화들의 명장면들을 패스티시하여 그 시절에 대한 향수와 경의를 표한다. 진부함을 숨기지 않고 전면에 내세워 즐기는 이 기법들은 비독창성이 어떻게 문화적 풍요를 만드는지 잘 보여준다.

8. 진부함이라는 토양 위에서 피어나는 꽃

다시 독창성이라는 단어를 곱씹어본다. 결국 "모든 독창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진부하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겸손해지라고 말하는 예술의 나침반과 같다. 내가 내뱉는 문장, 내가 그리는 선, 내가 만드는 선율 중 그 어느 것도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인정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인류가 쌓아 올린 거대한 진부함의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려와 그 가장자리에 아주 작은 낙서 하나를 남기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낙서가 다음 사람에게는 또 다른 영감이 되고, 그렇게 진부함은 겹겹이 쌓여 찬란한 역사가 된다. 오늘 당신이 본 영화, 들었던 노래, 혹은 친구와 나눈 익숙한 대화 속에서 '비독창성'의 편안함을 느껴보길 바란다.

 

완전히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우리를 둘러싼 낯익은 것들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재조합해보라. 그 진부한 재료들이 당신이라는 고유한 필터를 통과할 때, 세상은 비로소 당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낯익은 새로움'으로 물들기 시작할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말은, 결국 내 안의 가장 진부한 기억들을 어떻게 낯설게 꺼내놓느냐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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