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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라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섭식 장애(Eating Disorder)의 인문학

by Godot82 2026.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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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식 장애-Eating disorder
섭식 장애-Eating disorder

1. 통제라는 이름의 예술: 신경성 식욕부진증

거식증으로 흔히 알려진 **신경성 식욕부진증(Anorexia Nervosa)**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가혹한 형태의 자아 지배다. 우리 시대의 몸이 더 이상 생물학적 유기체가 아니라 하나의 '전시물'이자 '수행의 장'이 되었다. 특히 **섭식 장애(Eating Disorder)**는 그 수행이 가장 비극적이고 치열하게 일어나는 지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적게 먹거나 많이 먹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무너져가는 자아를 붙들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조각하려는, 슬프고도 처절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다. 신경성 식욕부진증(Anorexia Nervosa)은 체중 증가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느끼며, 비정상적으로 낮은 체중을 유지하려는 상태다. 자신의 체중이나 체형을 인식하는 방식에 심각한 왜곡이 동반된다.

 

넷플릭스 영화 **<투 더 본(To the Bone)>**의 주인공 엘렌을 떠올려보자. 그녀는 자신의 팔뚝 굵기를 손가락으로 재며 안도감을 느낀다. 그녀에게 칼로리를 계산하고 음식을 거부하는 행위는,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하려는 몸부림이다.

 

이것은 미술사에서 말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극단적 변주와 닮았다. 불필요한 모든 것을 제거하고 본질(뼈)만 남기려는 시도다. 하지만 예술과 달리 현실의 몸은 본질만 남기고 사라질 수 없다.

 

스마트폰의 사진 보정 앱을 생각해 보면 쉽다. 우리는 사진 속의 나를 더 날씬하게, 더 완벽하게 '보정(Edit)'한다. 거식증 환자들은 이 보정 작업을 자신의 실제 육체에 직접 수행한다. 현실의 자아와 이상적인 자아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깎아내는 것이다.

2. 채워지지 않는 구멍: 신경성 폭식증과 폭식장애

반대로, 내면의 허기를 음식으로 채우려다 죄책감에 무너지는 이들이 있다. 바로 **신경성 폭식증(Bulimia Nervosa)**과 **폭식장애(Binge Eating Disorder)**를 겪는 이들이다. 신경성 폭식증(Bulimia Nervosa)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 폭식 삽화가 반복되며, 이후 체중 증가를 막기 위해 구토, 하제 사용 등 부적절한 **제거 행동(Purging)**을 하는 상태다.

 

폭식장애(Binge Eating Disorder)는 제거 행동 없이 반복적으로 폭식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음식으로 감정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하지만, 이후 극심한 자괴감에 시달린다. 드라마 **<더 크라운(The Crown)>**에서 다이애나 비가 화려한 왕실의 삶 이면에서 겪었던 폭식과 구토 장면은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녀에게 음식은 외로움과 압박감을 잠시 잊게 해주는 유일한 위안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혐오하게 만드는 독이었다.

 

폭식과 제거의 반복은 마치 시계추가 양극단을 오가는 것과 같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소비 지향적인 자본주의 구조와 닮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폭식)하라고 강요받지만, 동시에 날씬하고 정돈된 몸(제거)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산다. 폭식증 환자의 몸은 이 상충하는 두 요구가 충돌하여 폭발하는 전쟁터다.

3. 판옵티콘의 시선: 신체 이형 장애와 사회적 구조

우리는 왜 이토록 자신의 몸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제러미 벤담이 설계하고 미셸 푸코가 분석한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개념이 숨어 있다. 판옵티콘(Panopticon)은 중앙의 감시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수들을 지켜보는 원형 감옥이다. 죄수들은 언제 감시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같은 SNS는 거대한 디지털 판옵티콘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시자 앞에서 자신의 몸을 전시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 **신체 이형 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다. 신체 이형 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는 자신의 외모 중 아주 사소하거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결함에 집착하며, 그로 인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괴로워하는 상태다.

 

영화 **<블랙 스완(Black Swan)>**의 니나를 보라. 그녀는 완벽한 '흑조'가 되기 위해 거울 속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감시한다. 거울 속의 자신은 실제보다 뚱뚱해 보이거나, 등에 돋아나는 깃털(환상) 때문에 괴물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거울 속의 이방인'을 만난다.

 

조명 아래서 비친 내 다리가 너무 굵어 보이거나, 사진 속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섭식 장애를 겪는 이들에게 거울은 세상을 보는 창이 아니라, 자신을 가두는 감옥의 창살이 된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가장 가혹하게 심판하는 재판관이 된다.

4. 강박적 건강이라는 역설: 오소렉시아

최근에는 새로운 형태의 섭식 장애가 주목받고 있다. 바로 '건강한 음식'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오소렉시아(Orthorexia)**다. 오소렉시아(Orthorexia)는 건강에 좋다고 믿는 음식만 먹으려는 강박적인 집착이다. 음식의 양보다 '질(Quality)'과 '순수함'에 과도하게 집중하며, 이를 어길 시 심한 불안을 느낀다.

 

이것은 현대판 성배 탐구와 같다. 유기농, 비건, 글루텐 프리 등 각종 식단 정보를 맹신하며 자신의 식탁을 '결백'하게 유지하려 한다. 사회학적으로 이는 불안정한 세상에서 내 몸의 '순수성'만은 지키겠다는 보수적인 방어 기제다. 하지만 건강을 위한 식단이 오히려 삶의 즐거움을 앗아가고 사회적 관계를 단절시킨다면, 그것은 더 이상 건강이 아니라 또 다른 이름의 감옥이다.

 

우리는 '바디 프로필' 열풍 속에서 이런 징후를 자주 목격한다. 완벽한 근육과 수치를 위해 인간 관계와 일상의 평화를 포기하는 것은, 건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또 다른 수행적 고통일 뿐이다.

5. 수행의 전환: 몸을 다시 나의 언어로 만들기

섭식 장애를 치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전시용 조각'에서 '살아있는 주체'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이것은 사회적 구조가 내 몸에 새겨놓은 가혹한 명령문들을 지우고, 나만의 언어를 다시 쓰는 과정이다. 우리는 섭식 장애를 단순히 의지력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한 개인의 삶의 맥락, 그가 속한 가족 구조, 그리고 끊임없이 '완벽'을 강요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얽혀 만들어낸 복합적인 결과물이다. 섭식 장애는 생물학적 취약성, 개인적 심리, 그리고 사회문화적 요인이 삼각형을 이루며 작용한다. 따라서 치유 역시 이 세 가지 측면에서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6. 식탁 위의 평화, 몸과의 화해

섭식 장애를 겪고 있는 당신에게, 혹은 그 곁을 지키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몸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미지'가 아니라, 당신이 세상을 경험하고, 사랑하고, 숨 쉬게 하는 '집'이다. 집이 조금 낡았다고 해서, 혹은 남들의 집보다 화려하지 않다고 해서 그 집을 부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울 앞에서의 감시를 멈추고, 내 몸이 보내는 작은 신호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배고픔은 부끄러운 결핍이 아니라 생명의 신호이며, 포만감은 탐욕이 아니라 평화의 상태다. 오늘 당신의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이 당신을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당신의 영혼을 다독이는 위로가 되길 바란다.

 

섭식 장애라는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길은, "나는 지금 이대로도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가장 단순하고도 어려운 명제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당신은 조각되어야 할 대리석이 아니라, 스스로 피어나는 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기억할 때, 비로소 몸이라는 무대 위에서 고통스러운 연극을 멈추고 진정한 삶의 수행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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