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안드레아 롱 추(Andrea Long Chu)의 《피메일스 Females》
안드레아 롱 추가 말하는 ‘여성(Female)’은 우리가 흔히 아는 생물학적 성별(Sex)이나 사회적 성별(Gender)의 카테고리를 훌쩍 넘어선다. 그녀에게 여성성이란 하나의 존재론적(Ontological) 위치다. 이 책은 단순히 페미니즘 이론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거울이자,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여성성’과 ‘욕망’의 구조를 해체하는 날카로운 수술칼이다.
안드레아 롱 추가 던지는 메시지는 간결하면서도 충격적이다. “모든 사람은 여성이다. 그리고 대개는 그 사실을 싫어한다.” 이 도발적인 문장에서 시작되는 긴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자. 추의 이론에서 ‘여성’이란 **“타자의 욕망을 위한 그릇이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자신의 주체적인 욕망보다는 타인이 나에게 투사하는 욕망을 수용하고, 그 욕망의 공간이 되어주는 수동적인 위치를 뜻한다.
일상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앤드리아(앤 해서웨이)를 기억한다. 그녀는 처음에는 패션계의 얄팍함을 경멸하지만, 어느새 편집장 미란다의 가혹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재편한다. 미란다가 원하는 ‘완벽한 비서’가 되기 위해 자신의 취향과 시간을 기꺼이 내주는 상태, 그것이 바로 추가 말하는 ‘여성적 위치’의 한 단면이다. 앤드리아가 생물학적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욕망을 수용하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여성’이 된다.
2. 발레리 솔라나스: 분노라는 이름의 수행성
이 책의 중심에는 발레리 솔라나스(Valerie Solanas)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있다. 그녀는 앤디 워홀에게 총을 쏜 인물이자, **《SCUM Manifesto (남성 박멸 선언서)》**를 쓴 과격한 작가다. 안드레아 롱 추는 솔라나스의 그 극단적인 분노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읽어낸다. 솔라나스는 남성을 ‘불완전한 여성’으로 정의했다.
남성이 끊임없이 여성에게 집착하고 여성을 소유하려 하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가진 ‘여성적 수동성’을 견디지 못해 타자에게 그 짐을 전가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중문화 속에서 이를 잘 보여주는 캐릭터는 영화 **<조커>**의 아서 플렉이다. 그는 사회의 무관심과 타인의 욕망(어머니의 환상, 코미디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등)을 일방적으로 받아내는 그릇으로 살다가 무너진다.
그가 조커로 변신하는 행위는 자신 내부의 극심한 ‘수동성’에 대한 파괴적인 반작용이다. 추가 보기에 솔라나스의 분노와 조커의 광기는 모두, 우리 내면에 도사린 ‘타자의 욕망을 받아내야만 하는 여성적 상태’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다.
3. 욕망은 나의 것이 아니다: 라캉의 거울
안드레아 롱 추의 논의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이론과 깊게 닿아 있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말했다. 타자의 욕망은 인간이 자신의 순수한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에게 바라는 것, 혹은 사회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는 개념이다.
우리는 흔히 내가 원해서 명품 백을 사고, 내가 원해서 좋은 대학에 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부모님의 기대, 친구들의 시선, 광고가 주입한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담는 그릇이며, 이 점에서 우리 모두는 근본적으로 ‘여성적’이다.
넷플릭스 예능 **<솔로지옥>**이나 <환승연애> 같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자.
출연자들은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지만, 사실 그들의 감정은 다른 출연자들의 선택이나 시청자들의 반응에 의해 민감하게 요동친다. ‘인기 있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현상은 전형적인 타자의 욕망을 따르는 행위다. 여기서 출연자들은 성별과 관계없이 서로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 되며, 추의 관점에서는 모두 ‘여성성’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4. 젠더 불쾌감과 존재의 허기
안드레아 롱 추가 스스로 트랜스여성이라는 사실은 이 논의에 더욱 절실한 무게를 더한다. 그녀는 자신의 **젠더 불쾌감(Gender Dysphoria)**을 이론의 토대로 삼는다. 젠더 불쾌감이란, 자신이 느끼는 성별 정체성과 생물학적 성별이 일치하지 않아 겪는 심각한 고통이나 불편함을 뜻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단순히 “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의 영혼” 같은 낭만적인 서사로 풀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 역시 일종의 ‘수동적 굴복’ 임을 인정하는 파격을 선보인다. 여성이 된다는 것은 더 완벽한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성’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타자의 욕망에 나를 내맡기는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5. 사회학적 함의: 상호수동성의 시대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피메일스》는 현대 사회의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상호수동성은 내가 직접 행동하거나 느끼는 대신, 다른 사물이나 타자가 나를 대신하여 느끼거나 행동하게 함으로써 만족을 얻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슬픈 영화를 보며 울지 않아도 영화 속 배경음악이 대신 슬픔을 연기해 주면 우리는 슬픔을 소비했다고 느낀다.
오늘날 우리는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에 나를 맡기고, SNS의 ‘좋아요’ 숫자에 내 기분을 의존한다. 알고리즘이 나 대신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선택해 주고, 이미지가 나 대신 나의 삶을 전시해 준다. 우리는 스스로 주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시스템의 욕망을 받아내는 수동적인 ‘여성’의 위치로 전락해 있다.
아이돌 팬덤 문화를 생각해 보자. 팬들은 아이돌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돈을 쏟아붓는다. 아이돌의 욕망(성공, 1위)이 팬의 욕망이 되고, 팬은 아이돌이라는 타자를 빛내기 위한 그릇이 된다. 안드레아 롱 추는 이러한 관계가 단지 팬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 전반과 정체성 형성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6. 자기혐오와 해방의 역설
추는 우리가 이 ‘여성성’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그릇이 된다는 것은 내 주체성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남성성’을 흉내 낸다. 여기서 남성성이란 생물학적 남자가 아니라, “나는 아무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주체다”라고 주장하는 완고한 태도를 뜻한다.
하지만 추가 제안하는 해방은 역설적이다. 내가 타자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 내가 근본적으로 ‘여성적(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가짜 주체성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약을 먹고 마주한 진실은, 자신의 온몸이 기계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그릇’으로 쓰이고 있었다는 비참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 수동성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네오는 매트릭스를 재구성할 힘을 얻는다. 《피메일스》가 우리에게 주는 빨간 약도 이와 같다. 우리가 서로의 욕망을 비추고 담는 연약한 그릇임을 인정할 때, 우리는 서로를 향한 가혹한 투사(Projection)를 멈출 수 있다.
7. 유목민적 주체로서의 초대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딸이자 아들로, 연인이자 친구로, 혹은 사회의 일원으로 타자의 기대를 먹고 자란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나’라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무수한 욕망들이 스쳐 지나가는 정거장일 뿐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유목민적인 시선으로 장르와 담론을 오가는 예술가들에게 이 공허함은 오히려 창조의 원천이 된다. 내가 고정된 ‘나’ 일 필요가 없다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이다.《피메일스》는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오늘 누구의 욕망을 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수동적인 위치를 얼마나 격렬하게 거부하고 있는가? 혹은, 그 비어있는 상태의 아름다움을 긍정할 준비가 되었는가?
안드레아 롱 추가 펼쳐 놓은 이 기묘하고도 도발적인 지도는, 우리가 성별이라는 낡은 경계선을 넘어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어있는 중심을 탐험하게 한다. 그 끝에서 당신은 비로소 타인의 욕망과 화해하고, 당신만의 새로운 수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