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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에 담긴 침묵의 서사: 소여헨(So Yo-hen)이 그리는 이주의 풍경

by Godot82 2026.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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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여헨-So Yo-hen
소여헨-So Yo-hen

1. 렌즈에 담긴 침묵의 서사: 소여헨(So Yo-hen)이 그리는 이주의 풍경

소여헨(蘇育賢, So Yo-hen) 감독의 영상은 마치 그 사진 속 인물들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말을 거는 것과 같은 기묘한 진동을 일으킨다. 그는 단순히 기록하는 자가 아니라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존재들의 목소리를 빛과 그림자로 빚어내는 연출가이자 수행적 예술가이다. 대만 출신의 이 젊은 거장이 보여주는 미학은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2. 타이난의 골목에서 베네치아의 무대까지

1982년 대만 타이난에서 태어난 소여헨은 대만 국립 예술대학교(NTUA) 미술학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며 예술적 기반을 닦았다. 그는 2011년 제54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대만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9세로 역대 최연소라는 기록을 세우며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후 2014년 대만 현대미술상(Taishin Arts Award) 대상을 수상하며 그 실력을 인정받았고, <나를 보러 오세요>(Come Here), <꽃피는 고향>(Blooming Island) 등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과 연극적 수행성을 결합한 독창적인 영상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작업은 이주 노동자와 소수자 서사, 그리고 잊힌 역사적 기억을 재구축하는 데 집중되어 있으며, 이는 대만 사회의 가장 깊숙하고 아픈 곳을 응시하는 행위이다.

3. 주변부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세우는 사회학적 시선

소여헨의 작업은 대만 사회의 보이지 않는 일꾼인 이주 노동자의 삶에서 출발한다. 그는 화려한 도시의 조명 뒤에서 묵묵히 기계를 돌리고 식사를 준비하는 이들의 얼굴을 카메라 정중앙에 배치한다. 이것은 사회학에서 말하는 주변주의(Marginalism)에 대한 예술적 저항이다.

 

주변주의란 사회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권력이나 혜택에서 소외된 계층이나 현상에 주목하는 태도를 뜻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저택 아래 지하광장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듯, 화려한 주인공이 아니라 그 뒤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이 일상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이주 노동자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연기하거나 노래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주체성(Subjectivity)을 부여한다. 우리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서 보는 관찰자의 시선을 넘어, 그는 출연자와 대등하게 소통하며 그들을 당당한 예술적 수행자로 변모시킨다.

4.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연극적 수행성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것이 실제 상황인지 정교하게 짜인 연극인지 모호해지는 지점이 발생한다. 소여헨은 의도적으로 무대 세트나 소품을 드러내며 관객에게 이것이 구성된 진실임을 일깨운다. 이러한 기법은 현대 예술의 브레히트적 거리두기(Brechtian Distanciation)와 맞닿아 있다.

 

거리두기 효과란 관객이 인물에게 감정적으로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여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만드는 연출 기법이다.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에서 촬영 중인 카메라 감독이 화면에 잡히거나 출연진이 제작진과 대화하며 지금이 방송 촬영 중임을 인지시키는 순간, 시청자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그는 이주 노동자들이 고향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조명기를 노출하거나 마이크를 보여주는 수행성(Performativity)을 발휘하여, 관객을 단순한 구경꾼에서 역사적 목격자로 격상시킨다.

5. 아카이브의 재구성과 구조주의적 통찰

소여헨은 과거의 문서나 사진, 구전되는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현대적인 영상으로 재해석하는 아카이브(Archive) 작업에 탁월하다. 아카이브란 보존 가치가 있는 기록이나 자료를 모아둔 저장소 혹은 그 자료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인스타그램에 매일 올리는 사진들이 나의 일 년을 설명하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되듯, 개인의 사소한 기록들이 모여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되는 것과 같다.

 

그는 이러한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거대한 의미 체계를 만드는 구조주의(Structuralism)적 접근을 취한다. 구조주의는 사물을 개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맺고 있는 전체적인 관계와 체계 속에서 의미를 파악하려는 이론이다. 그는 이주 노동자들이 만든 가사와 선율을 통해 대만이라는 공간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구조적으로 분석한다.

6. 유목민적 감각으로 빚어낸 숭고한 물성의 미학

감독의 작업은 그 자체로 유목주의(Nomadism)를 반영하며, 이는 특정한 방식에 정착하지 않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 이동하는 사유 방식이다. 그의 카메라는 고정된 시선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이방인의 감각으로 새로운 관계를 탐색한다. 또한 그는 영상의 물성(Materiality)을 다루는 데 매우 섬세한데, 물성이란 재료가 가진 고유한 물리적 성질을 뜻한다.

 

고해상도 영상이 주는 매끈한 느낌과 오래된 캠코더의 지지직거리는 영상이 주는 빈티지한 느낌의 차이가 일상의 예이다. 소여헨은 거친 화면과 정제된 미장센을 오가며 관객이 영상 속 인물의 내면에 가닿게 한다. 그의 작품은 텅 빈 극장에 홀로 앉아 스크린 너머의 존재와 은밀하게 대화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7. 부서진 파편들이 일구는 눈부신 연대와 희망

소여헨의 예술은 결국 연대에 관한 이야기이며, 부서지고 소외된 존재들을 모아 그들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과정이다. 영시의 한 구절처럼 조각난 것들이 모여 온전함을 이루듯, 그의 영상은 찢긴 이주민들의 삶을 예술이라는 바늘로 촘촘히 꿰맨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타인을 단순히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며 공감하는 법을 배운다.

 

그의 영화는 세련된 기술로 무장한 할리우드 영화와는 다르지만, 그곳에는 사람의 온기와 역사를 대하는 겸허한 자세가 있다. 마블 히어로들이 지구를 구하는 방식보다 소여헨의 주인공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노래 한 곡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훨씬 더 장엄한 구원으로 다가온다.

 

그의 렌즈는 권력자의 무기가 아니라 목소리 없는 자들의 마이크가 되어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을 눈부신 빛으로 채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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