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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유령 혹은 관찰자: 플라뇌르가 걷는 법

by Godot82 2026.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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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뇌르-Flâneur
플라뇌르-Flâneur

1. 거북이를 산책시키던 사람들: 플라뇌르의 탄생

비가 내린 뒤의 보도블록 위로 도시의 네온사인이 번지는 밤을 좋아한다. 목적지 없이 걷다 보면 문득 내가 이 거대한 유기체의 일부라는 사실과, 동시에 철저한 타자라는 사실을 동시에 깨닫는다. 20여 년간 사회학과 예술의 경계에서 길을 잃고 다시 찾기를 반복하며 내가 가장 매료되었던 인물상은 바로 **플라뇌르(Flâneur)**다.

 

프랑스어로 ‘산책자’ 혹은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을 뜻하는 이 단어는 단순히 걷는 행위를 넘어, 근대성의 한복판에서 예술적 영감을 길어 올리는 특별한 태도를 의미한다. 19세기 파리의 거리에서 태어난 이 존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플라뇌르는 프랑스어로 ‘산책자’,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을 뜻한다. 단순히 목적지 없이 걷는 사람을 넘어, 도시의 군중 속에서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며 현대성을 탐구하는 예술가적 태도를 지닌 인물을 지칭한다.

 

이들은 군중 속에 섞여 있지만 결코 그들과 동화되지 않는다. 마치 수족관 밖에서 물고기들을 관찰하는 사람처럼, 도시라는 거대한 어항 속을 유영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Gil)이 자정의 종소리와 함께 과거의 파리로 빠져드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그는 현대의 속도감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낭만을 찾아 헤매는 전형적인 플라뇌르의 초상이다.

2. 발터 벤야민과 '군중 속의 고독'

사회학적으로 플라뇌르를 완성한 인물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다. 그는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로 읽었다. 플라뇌르에게 거리는 거실과 같고, 건물의 외벽은 서재의 책장과 같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아우라(Aura)**와 **충격 경험(Shock Experience)**이다.

 

아우라(Aura)는 예술 작품이나 대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유하고 독특한 분위기, 혹은 ‘기운’을 뜻한다. 벤야민은 복제 기술의 시대에 예술의 아우라가 붕괴된다고 보았지만, 플라뇌르는 도시의 찰나적인 순간에서 자신만의 아우라를 발견한다. 충격 경험(Shock Experience)은 현대 도시의 번잡함, 소음, 수많은 정보가 인간의 감각에 가하는 자극을 의미한다.

 

도시의 삶은 피곤하다. 지하철의 인파, 쏟아지는 광고판, 끊임없는 소음은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플라뇌르는 이 충격을 방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관찰의 재료로 삼는다. 예를 들어, 홍대 거리의 복잡한 인파 속에서 누군가는 짜증을 느끼지만, 플라뇌르는 그들의 옷차림, 표정, 스쳐 지나가는 대화의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서사를 만든다.

3. 대중문화 속의 플라뇌르: <Her>와 시티팝(City Pop)

영화 **<Her(그녀)>**의 주인공 테오도르를 생각해 보자. 그는 붉은 셔츠를 입고 미래 도시의 고층 빌딩 사이를 정처 없이 걷는다. 그는 군중 속에 있지만, 인공지능 사만다와 대화하며 철저히 혼자다. 그는 현대적인 의미의 플라뇌르다. 도시의 화려한 외관(스펙터클) 뒤에 숨겨진 개인의 고독과 우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걷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몇 년간 유행한 **시티팝(City Pop)**은 플라뇌르적 감수성의 절정이다. 80년대 일본의 거품경제 시절, 화려한 밤거리와 세련된 도시의 정취를 노래하는 시티팝은 가사 속에 늘 '도시를 배회하는 나'를 상정한다. "창밖의 불빛들을 보며 드라이브를 하거나 걷는 나"의 이미지는, 고독하지만 세련된 관찰자로서의 자아를 투영한다.

 

우리가 세련된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놓고 창밖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행위,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익숙한 동네를 낯설게 산책하는 행위 모두가 현대판 플라뇌르의 수행이다.

4. 심리지리학: 도시를 유희적으로 가로지르기

플라뇌르의 개념은 이후 **심리지리학(Psychogeography)**으로 확장된다. 심리지리학은 지리적 환경이 인간의 감정과 행동에 미치는 구체적인 법칙이나 효과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상황주의자들은 이를 통해 정해진 길로만 다니는 도시인의 습관을 깨뜨리려 했다.

 

일상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보통 출근이나 등교를 할 때 가장 빠른 길, 효율적인 길을 선택한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꽃집을 발견하거나, 담벼락 아래 졸고 있는 고양이를 마주치는 순간, 도시는 더 이상 기능적인 공간이 아니라 '나의 공간'이 된다.

 

이것을 **전유(Détournement / Appropriation)**라고 한다. 기존의 질서를 비틀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플라뇌르는 도시가 설계된 목적(소비와 이동)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유희적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다.

5. 디지털 플라뇌르: 알고리즘의 숲을 걷다

이제 플라뇌르의 무대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 웹(Web)으로 확장되었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켜고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탐색하거나,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을 따라 정처 없이 파도를 탄다. 이것이 **디지털 플라뇌르(Digital Flâneur)**다. 하지만 진정한 플라뇌르와 단순히 '킬링 타임'을 하는 사용자는 한 끗 차이다.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정보에 매몰되면 우리는 관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가 된다.

 

진정한 디지털 플라뇌르는 쏟아지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비판적 시선을 유지한다. 유행하는 밈(Meme) 뒤에 숨겨진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고, 왜 지금 이 텍스트가 소비되는지를 묻는 사람이다. 웹 서핑이라는 행위를 통해 현대 사회의 구조를 읽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강조하는 '새로운 수행성'이다.

6. 우리 모두는 산책자가 되어야 한다

구조주의(Structuralism)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사회적 구조 속의 부속품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플라뇌르적 태도는 그 견고한 구조 속에 미세한 균열을 낸다. 우리가 시스템이 정해놓은 효율의 속도에서 벗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구조 밖의 풍경을 볼 수 있다.

 

"가장 좋은 논문은 도서관 책상 앞이 아니라, 이름 모를 골목길에서 태어난다"날 수도 있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악보 위의 음표나 캔버스 위의 물감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산책자의 시선이다. 오늘 퇴근길에는 버스 한 정거장 미리 내려보는 건 어떨까. 이어폰에서 흐르는 음악을 영화의 배경음악 삼아, 당신 앞에 펼쳐진 도시라는 무대를 관찰해 보자.

 

당신이 마주치는 모든 낯선 얼굴과 간판, 보도블록 사이의 이끼조차도 당신의 시선 안에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플라뇌르가 된다는 것은, 결국 소외된 나를 다시 세상의 중심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타인이 정해놓은 속도가 아닌, 나만의 리듬으로 세상을 호흡하는 일이다. 그 유목민적인 발걸음 속에서 당신만의 새로운 담론이 시작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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