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나무와 돌의 숨결을 깨우는 영원한 이방인: 김윤신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 그녀의 조각은 나무와 돌이라는 단단한 물질 속에 숨겨진 우주의 원형을 끄집어내는 집요한 대화의 산물이며,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장엄한 서사시를 이룬다. 그것은 단순히 정교하게 깎인 목재가 아니라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온 생명체가 작가의 거친 손길을 만나 내뱉는 깊은 숨결처럼 느껴진다.
1935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윤신은 1959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각과를 졸업하며 한국 현대 조각의 태동기에 본격적인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1964년부터 1969년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인 보자르(Beaux-Arts de Paris)에서 수학하며 서구 현대 조각의 정수를 흡수했고, 귀국 후 한국여류조각가회를 창립하는 등 한국 미술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1984년 한국에서의 안정적인 교수직과 사회적 지위를 뒤로하고 돌연 아르헨티나로 떠나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예술가로서의 순수한 갈증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이 유목민적 결정은 그녀의 예술 세계를 근본적으로 뒤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그녀의 삶의 궤적은 사회학에서 말하는 유목주의(Nomadism)의 정수를 보여주는데, 이는 특정한 가치나 삶의 방식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 이동하는 사유 방식을 의미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8(Sense8)'의 주인공들이 전 세계를 오가며 서로의 감각을 공유하고 연결되는 것처럼, 한 장소나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김윤신은 낯선 땅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자연에서 만난 거대하고 단단한 나무들을 동반자 삼아 이방인이자 목격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재구성했다.
2. '합이이일(合二爲一)', 두 존재가 만나 하나가 되는 우주적 질서
김윤신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철학은 합이이일(合二爲一)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 하나를 이룬다는 동양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며, 작가가 나무를 깎아내고 쪼개는 행위를 통해 나무의 내면을 드러내고 그 빈 공간에 자신의 정신을 채워 넣는 과정을 설명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통해 자신과 재료가 주객의 관계를 넘어 하나의 생명체로 통합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철학적으로 물성(Materiality)이라는 용어로 구체화되는데, 이는 사전적으로 물질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이나 특성을 뜻한다. 우리가 일상의 예에서 요리사가 같은 밀가루를 가지고도 물의 양이나 반죽의 강도에 따라 수제비와 빵이라는 전혀 다른 질감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재료 자체가 가진 성질을 예술적으로 극대화하는 행위가 바로 물성을 살리는 작업이다.
김윤신은 나무라는 재료를 억지로 굴복시키지 않고 나무가 가진 옹이와 갈라짐, 결의 흐름을 그대로 존중하며 칼질을 더한다. 이는 마치 K-pop 그룹의 멤버들이 각자의 개성을 뚜렷하게 유지하면서도 무대 위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강력한 시너지(Synergy)를 만들어내는 것과 유사하다.
3. 구조주의적 통찰과 몸으로 써 내려가는 조각의 수행성
김윤신의 조각은 단순히 자연의 형태를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직과 수평, 안과 밖, 채움과 비움이라는 구조주의(Structuralism)적 질서 속에서 탄생한다. 구조주의란 사물이나 현상을 개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맺고 있는 전체적인 관계와 체계 속에서 의미를 파악하려는 이론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레고(LEGO)' 블록 하나는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없지만 그것들이 어떤 규칙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이 되기도 하고 자동차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전체 시스템 속에서 개체의 의미가 결정된다는 생각이다. 김윤신의 조각 역시 나무 조각들이 서로 맞물리고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그 생명력을 발휘한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전기톱을 들고 거친 나무 기둥을 마주하는 김윤신의 모습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예술적 사건이다. 그녀에게 조각은 완성된 결과물보다 나무와 대화하며 온몸으로 땀 흘리는 행위의 시간 속에 더 큰 진실이 담겨 있다.
4. 잃어버린 원형을 복원하는 조각의 아우라와 생명력
김윤신의 작품 앞에 서면 복제할 수 없는 숭고함, 즉 아우라(Aura)가 느껴진다. 아우라는 사전적으로 예술 작품이 지닌 고유한 분위기나 숭고한 기운을 뜻하며,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의미한다. 수많은 아이돌 굿즈가 복제되어 쏟아져 나와도 실제 공연장에서 아티스트를 직접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그 압도적인 현장감과 전율이 바로 아우라의 현대적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김윤신은 문명 이전의 원초적인 힘인 원형(Archetype)을 조각함으로써 우리에게 이러한 아우라를 전달한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원시 예술에서 느껴지는 투박하면서도 강력한 생명 에너지가 그녀의 목조각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녀의 작품은 현대의 차가운 미니멀리즘과는 결을 달리하며 뜨겁고 거칠게 생동한다.
김윤신은 디지털 시대에 잊혀가는 촉각적 진실을 우리에게 되돌려주며, 손으로 만지고 깎고 다듬는 행위가 얼마나 고귀한지를 증명한다. 202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이러한 원형적 생명력이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입증한 결과이기도 하다.
5. 시대의 제약을 넘어 주체적 삶을 개척한 여성 예술가의 초상
김윤신의 삶은 단순히 예술적 성취를 넘어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여성 예술가가 자신의 길을 어떻게 개척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주체성(Subjectivity)의 기록이다. 주체성이란 외부의 강요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성질을 뜻한다.
1930년대에 태어나 전쟁의 포화를 겪고 파리 유학을 거쳐 남미의 낯선 땅으로 떠난 그녀의 여정은 가부장적 사회 구조와 여성에게 주어진 사회적 제약을 온몸으로 돌파한 투쟁기다. 그녀는 조각이라는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거친 장르를 선택했고 오직 예술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전진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자신의 이름을 딴 김윤신 미술관(Museo Kim Yun Shin)을 세우고 운영하며 현지인들과 예술로 교감하는 그녀의 모습은 국경과 인종을 넘어선 진정한 세계 시민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녀의 예술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칼질을 멈추지 않는 현재진행형의 신화로 우리 곁에 살아 있다.
6. 나무와 돌이 일구는 영원한 생명의 찬가와 위로
결국 김윤신의 예술은 살아있음에 대한 찬사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그녀는 나무의 갈라진 틈 사이로 우주의 질서를 보고 돌의 단단한 피부 속에서 부드러운 영혼의 떨림을 찾아낸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나무토막 하나에서도 우주 전체의 섭리를 발견해 내는 예술적 혜안을 지녔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이라는 거대한 나무 기둥을 깎아나가는 조각가들과 다름없다. 때로는 삶의 무게에 눌려 옹이가 지고 예기치 못한 시련에 마음이 갈라지기도 하겠지만, 김윤신이 보여주었듯 그 상처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정성스럽게 다듬어갈 때 우리만의 찬란한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조각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삶이라는 재료를 얼마나 사랑하며 대화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또 다른 예술 작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