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므네모시네 (Mnemosyne)
므네모시네는 그리스 신화에서 ‘기억을 맡은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기억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억을 ‘건네주고’, ‘보호하고’, 때로는 ‘숨겨두는’ 존재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웅덩이처럼, 때로는 연못, 때로는 호수처럼 우리를 비추는 물결을 만드는 여신이다.
2. 기억은 늘 물결처럼 돌아온다
나는 종종 기억을 바다 위의 조용한 파도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먼 곳에서 출발해 아주 느리게 다가오고, 때로는 우리가 눈치채기도 전에 발목을 적시며 지나가버린다. 그리고 이 물결을 지켜보는 존재가 바로 므네모시네이다. 우리가 기억을 떠올리는 방식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물건을 잃어버린 날의 걷잡을 수 없는 초조함, 첫사랑의 목소리처럼 흐릿해져도 잊히지 않는 잔향, 어머니의 주방에서 나던 양파 볶는 소리와 냄새. 이런 기억들은 우리의 호출과 상관없이 불쑥 찾아오기도 하고, 열 번을 불러도 응답하지 않을 때도 있다. 대중예술에서도 기억은 늘 신적인 존재처럼 다뤄진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떠올려보자. 커플이 서로의 기억을 지우는 장치에 몸을 맡기지만, 기억은 도망가고 구석에 숨어버린다. 그것은 지우려 한다고 지워지지 않는, 더 정확히 말하면 기억도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다. 기억은 늘 물결처럼 돌아온다.
그리고 그 물결을 누가, 어디서 보내고 있는지 묻는다면, 고대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므네모시네가 그 물결을 지켜보고 있다.”라고.
3. 여신이 만든 아홉 갈래의 흐름
므네모시네는 단지 기억을 간직하는 여신이 아니다. 그녀는 그리스 신화 속 예술가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우리가 잘 아는 뮤즈(Muses), 즉 예술과 학문의 영감의 여신 아홉 명을 낳은 존재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기억이 단지 과거를 저장하는 서랍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기억은 예술이 태어나는 원천이며, 영감이 발아하는 씨앗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들었던 자장가 한 곡이 오래된 사진 속 표정 하나가 지나가던 버스 창문에 비친 얼굴이 모두 예술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될 때가 있다. 책을 쓰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 모두 결국 자신이 가진 기억을 변주하고 재배열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기억이 없다면 예술도 없다. 그렇기에 고대인들은 기억의 여신을 예술의 어머니로 여겼다.
4. 우리 모두는 기억의 강을 건넌다
그리스 신화에서 죽은 이들은 세 개의 중요한 강을 건너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레테(Lethe), 망각의 강이다. 이 강의 물을 마시면 생전의 기억이 모두 흐려지고, 인간은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흥미롭게도 므네모시네는 이 레테와 대칭을 이루는 존재다. 하나는 기억을 소멸시키고, 하나는 기억을 비축하며 세상에 흘려보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두 강 사이를 오가며 걷는 듯한 삶을 살아간다. 기억하고 싶은 것은 쉽게 잊히고, 잊고 싶은 것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며 새것을 채우려면 오래된 것을 어느 정도 비워야 한다. 이런 모순적인 삶은 가끔 우리를 괴롭히고, 때로는 더 깊은 생각으로 이끈다.
5. 대중예술 속에서 되살아나는 여신
우리가 므네모시네라는 이름을 자주 듣지는 않지만, 그녀가 남긴 개념은 지금도 예술과 문화 곳곳에서 살아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인셉션>에서 기억은 방의 구조를 바꾼다 꿈속의 건물이 기억에 의해 뒤틀리고, 주인공의 과거가 계속해서 현재의 행동을 흔들어놓는다. 기억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다.
애니메이션 <코코>를 떠올려보자. 망각의 강을 건너기 전에 누군가가 우리를 기억하는 한, 죽음조차 완전히 우리를 데려갈 수 없다는 메시지가 있다. 므네모시네의 이야기와 가장 닮아 있는 서사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가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녀의 앨범들은 개인의 기억을 곱씹는 일에 가깝다.
오래된 감정들이 재조립되고, 과거의 순간들이 예술의 소재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바로 기억의 여신이 오래전부터 해오던 일의 현대적 버전이다. 이처럼 예술은 늘 기억의 강가에서 태어난다. 므네모시네가 손끝으로 물을 흔들면, 우리는 그 잔물결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의 형상을 발견한다.
6. 기억은 우리를 살게 한다
나는 우리가 누구인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정의할 때 직업이나 나이, 성격을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가 품고 있는 기억들의 총합이다. 어떤 사람과 나눈 짧은 대화나 떠오르지 않는 꿈의 잔상,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오래된 질문 하나 등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천천히 만들어간다.
므네모시네는 이런 존재의 근본을 지키는 여신이다. 그녀는 기억을 담아두고 흘려보내며, 인간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벼랑 끝에서 붙들고 있다. 결국, 기억이 존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