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소리의 벽 (Sound Barrier)
오래된 골목을 지나갈 때 누구나 한 번쯤은 공기 속에 숨어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장벽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처음 그 감각을 떠올린 건 내가 뱉은 숨에 한겨울 버스 창문이 뿌옇게 흐려지던 어느 저녁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거리는 축축한 바람만이 얼음처럼 흘렀다. 그때 나는 알았다. 공기는 항상 우리 주변에 있으면서도, 때로는 우리를 가로막는 벽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소리의 벽(Sound Barrier)’이라는 표현은 원래 과학의 언어다. 물체가 음속 그러니까 약 초속 340미터쯤 되는 속도를 돌파할 때 공기가 들고 일으키는 반발의 장벽.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을 들이받는 것처럼 흔들리고, 저항이 폭발하고, 뒤이어 ‘쾅’ 하는 음속폭음이 남는다. 하지만 이 거친 표현에는 과학만큼이나 삶의 체온도 있다.
2. 소리보다 빨리 달리는 삶의 순간들
우리가 속도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어디론가 달려가는 동안 잃어버린 얼굴들 일지 모른다. 삶은 늘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과 앞을 향해 달려야 한다는 강박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소리의 벽’은 이상하게도 비유가 된다.
비행기가 음속을 돌파할 때 겪는 일이란 속도가 증가할수록 공기 저항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기체가 떨리고 심지어 부서질 것처럼 흔들리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 어떤 결단을 앞두고 느끼는 떨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을 고백하기 직전의 심장 박동이나 오랫동안 미뤄왔던 말을 꺼내기 전의 긴장으로 떨리는 입술 같이 인생에도 음속 근처의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에는 온 세상이 우리에게 “조금만 더 버텨라”라고 말하는 듯하고, 뼈까지 흔들리는 압력이 몰려온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압력을 버텨내고 통과하면, 뒤늦게 ‘쾅’ 하고 어떤 결과가 터져 나온다. 대중예술 속에서도 이런 장면은 익숙하다. 예컨대 영화 <탑건>에서 파일럿들은 속력을 높이며 음속을 넘는 순간을 기다린다.
기체는 요동치고, 계기판은 위험을 경고하며, 그들은 이를 악물고 스로틀을 밀어붙인다. 벽을 넘는 순간,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기체가 매끄럽게 가라앉는다. 그 장면은 사실 우리가 살아온 많은 밤들을 닮았다. 흔들리고, 조마조마하며, 때로는 망가질 것 같았지만 결국 넘어서고 나면 이상하게 모든 것이 조용해지는 순간 말이다.
소리의 벽을 넘는 순간 가장 먼저 찾아오는 건 침묵이다. 그것은 세상의 소리가 꺼진 침묵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을 압도하던 저항이 사라질 때 나타나는 고요다.
3. 대중예술에서 만나는 소리의 벽들
음악에서도, 영화에서도, 게임에서도 소리의 벽은 어디에나 있다. 록 밴드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의 ‘소음 벽(Wall of Sound)’은 소리의 장벽을 예술로 바꿔버린 대표적 사례다. 폭발적인 기타 노이즈가 듣는 이를 압도하고, 한계를 넘은 음압이 감정의 경계를 찢어낸다. 벽은 더 이상 방해물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의 문이 된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쿠퍼가 웜홀을 통과하는 장면에서 음향이 급격히 사라지고 스크린은 어둡게 진동한다. 그 순간 관객은 세계와 세계 사이의 ‘소리 없는 벽’을 통과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게임 <젤다의 전설>에서의 고원 장벽도 있다. 처음 시작할 때 Link는 고원에 갇혀 있다. 자유롭게 보이지만 사실 벽이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어딘가까지 가면 차가운 기류가 닿고, 더 가면 죽음이 온다. 그 보이지 않는 장벽은 우리에게 세계의 넓이를 가르치고, 더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몰랐을 뿐, 예술은 늘 소리의 벽과 비슷한 문턱을 우리 앞에 놓아두고 있다.
4. 넘어야 할 벽은 어디에 있는가
소리의 벽은 물리적인 개념에서 출발했지만,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데 더 자주 사용된다. 사랑 앞에서 주저하는 사람에게 혹은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는 예술가에게 또는 어둡고 긴 안갯속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소리의 벽은 말한다. “지금 흔들리는 건, 네가 잘못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네가 충분히 빠르게, 충분히 진지하게,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우리가 사는 시대는 끝없이 흔들린다. 뉴스는 항상 시끄럽고, 도시의 밤은 언제나 밝으며, 사람들의 마음은 예전보다 빨리 닳아 없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진동과 소음 사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일지도 모른다.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벽을 넘을 준비를 하는 것 그리고 침묵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