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검은 불꽃의 침묵, 숯의 영혼을 깨우다: 이배가 그리는 시간의 궤적
안도 타다오의 건축적 미학이 살아 숨 쉬는 '뮤지엄 산(Museum SAN)'의 긴 복도를 걷다 보면, 우리는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어떤 강렬한 '검은색'과 마주하게 된다. 그 검은색은 단순히 색채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수천 도의 열기를 견뎌낸 나무의 마지막 외침이자, 동시에 모든 색을 품고 다시 태어난 생명의 정수다.
작가 **이배(Lee Bae)**의 작업은 언제나 거대한 명상과 같다. 그는 숯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이고도 원초적인 매체를 통해 서구 현대미술의 문법 위에 동양적 사유를 덧입힌다. 이제 곧 뮤지엄 산에서 펼쳐질 그의 전시를 앞두고, 우리가 왜 이 '숯의 예술가'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는지,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한 편의 수필처럼 풀어내고자 한다.
2. 청도에서 파리까지, 숯을 든 노매드
작가 이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뿌리'와 '여정'을 살펴야 한다. 그는 195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1990년, 서른 중반의 나이에 무작정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파리라는 낯선 땅에서 무명작가로 고군분투하던 그가 주목한 것은 가장 흔하고 값싼 재료였던 '숯'이었다.
동양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그는 한국의 장례 문화나 기우제, 혹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금줄에 걸던 숯에서 고향의 냄새와 영원성을 발견했다. 그는 숯을 갈고, 자르고, 붙이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검은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한국 실험미술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후 프랑스 기메 박물관, 뉴욕 록펠러 센터 등 세계적인 예술 공간에서 전시하며 명성을 쌓았다. 특히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 빌모트 파운데이션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며 한국 현대미술의 위상을 높였다.
3. 물질의 연금술: 숯, 죽음에서 영원으로
이배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물질성(Materiality)**이다. 물질성 (Materiality)은 예술 작품이 가진 물리적 재료의 특성을 뜻한다. 재료가 주는 촉감, 무게, 질감 등이 작품의 의미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상태다. 그의 대표 시리즈 중 하나인 **<불로부터(Issu du feu)>**는 숯 덩어리들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인 뒤 표면을 매끄럽게 갈아낸 작업이다.
숯은 나무가 불이라는 극한의 고통을 통과하며 남긴 '뼈'와 같다. 그는 이 죽은 나무의 잔해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 일상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캠핑장에서 '불멍'을 하고 난 뒤 남은 재와 숯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누군가에게는 치워야 할 쓰레기겠지만, 이배에게 그것은 시간의 응축물이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노승이 자신의 몸을 태워 등신불이 되는 장면처럼, 나무는 스스로를 태워 숯이라는 가장 순수하고 단단한 본질을 남긴다. 이배는 그 본질을 통해 우주의 질서를 이야기한다.
4. 여백의 미학: 비어있기에 충만한 검은빛
이배의 최근 작업인 <붓질(Brushstroke)> 시리즈는 우리에게 친숙한 '서예'의 감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그의 캔버스 위에는 거대한 숯가루 액(먹액)의 흔적이 일필휘휘지(一筆揮之)로 그어져 있다. 흰 바탕 위를 가로지르는 검은 획은 마치 현대판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깊은 정적이 흐른다.
5. 수행으로서의 예술: 몸이 기억하는 시간
이배의 작업은 지극히 **수행적(Performative)**이다. 그는 숯가루를 개어 만든 액을 사용해 수천 번, 수만 번의 획을 긋는다. 이는 흡사 수도승이 절을 올리거나 경전을 베껴 쓰는 사경(寫經)의 과정과 닮았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매일 아침 조깅을 하거나, 일기를 쓰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그 반복적인 행동이 쌓여 우리의 인격과 근육을 형성하듯, 이배의 선은 그의 근육과 호흡이 만들어낸 정직한 기록이다. 서구의 추상표현주의 작가 잭슨 폴록이 자신의 감정을 쏟아부었다면, 이배는 자신의 감정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자연의 섭리'를 채워 넣는다.
6. 안도 타다오와의 대화: 뮤지엄 산에서의 이배
이번 뮤지엄 산에서의 전시는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하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은 빛과 노출 콘크리트, 그리고 자연의 조화를 추구한다. 여기에 이배의 숯이 더해지는 것은 '불(숯)'과 '빛(건축)'의 만남이다. 뮤지엄 산의 돌담과 물의 정원을 지나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마주할 이배의 대형 설치 작업들은 건축물의 기하학적 선과 공명할 것이다.
숯의 검은색은 안도 타다오의 회색 콘크리트 벽면 위에서 더욱 깊은 깊이감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건축가가 설계한 빛의 통로를 따라가며, 이배가 배치한 숯의 숲을 산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을 넘어, 우리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실존적(Existential) 여행이 된다.
7. 마치며
숯은 불에 타는 동안은 뜨겁지만, 식고 나면 주변의 독소를 빨아들이고 정화하는 힘을 가진다. 이배 작가가 숯을 통해 전하고 싶은 진심도 바로 이 '정화'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나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다. 끊임없이 자극적인 이미지가 쏟아지고, 소유해야 할 물건들은 넘쳐난다. 이러한 과잉의 시대에 이배의 '검은색'은 우리에게 멈춤을 권한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태워야 다시 피어날 수 있다는 가장 원초적인 진리 말이다. 뮤지엄 산의 푸른 하늘과 이배의 깊은 검은색이 만나는 그 장소에서, 당신도 마음속의 소음을 잠시 내려놓길 바란다. 숯의 거친 질감을 눈으로 더듬고, 여백의 평온함을 호흡하며 당신만의 '검은빛'을 발견하게 되기를. 그것이 이 시대의 거장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귀한 선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