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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색도 아닌 색에 대하여 – 현대 미술 속 모노크롬을 걷다〉

by Godot82 2025.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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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크롬-mono-chrome
모노크롬-mono-chrome

 

1. 모노크롬 (mono-chrome)

어쩌면 색이라는 것은 눈을 감았을 때 더 뚜렷해질지도 모른다. 어두움 속에서 한 차례 시야가 비워진 후, 눈꺼풀 너머 잔광처럼 맴도는 감정의 빛. 나는 그 순간을 생각한다. 바넷 뉴먼의 거대한 붉은 화면 앞에 섰을 때도, 로스코의 뭉개진 자주색을 마주했을 때도, 혹은 집에서 조용히 휴대폰 화면 속 흰 바탕을 바라보다 마음이 미세하게 흔들렸을 때도. 색은 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수행한다. 

2. 모노크롬, 하나의 색이 아닌 세계의 방식

모노크롬(mono-chrome). 직역하면 “하나의 색”이지만, 사실 이 말은 하나의 색으로 모든 것을 말해보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마치 하루 종일 회색 하늘 아래를 걸을 때, 기온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공기가 어떤 말로도 포착되지 않는 감정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 일상에도 모노크롬의 순간은 있다.

 

예를 들어, 장마철 흐린 날, 모든 건물이 자연스레 같은 톤으로 정리되는 도시의 표정. 혹은 영화〈로마〉나 봉준호 감독의〈살인의 추억〉초반부처럼 습기와 흙빛이 화면 전체를 잠식하며, 관객이 이야기보다 분위기 속으로 먼저 빠져드는 순간 말이다. 모노크롬은 단지 색의 절약이 아니라, 감각의 집중이다.

 

유명한 이브 클라인의 국제클라인블루(IKB)를 떠올려보자. 한 톤의 파란색만으로 관람자의 정서를 고요하게 흔들어버리는 그림, 마치 바다를 보았지만 물도 수평선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의 감각이 떠오른다.

3. 색을 지운다, 아니 정리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왜 굳이 하나의 색만? 다양함은 어디로 갔나?” 하지만 모노크롬은 다양함의 소멸이 아니라, 내면의 확장을 위해 바깥을 잠시 접어두는 행위다. 음악으로 치면 단음의 반복, 미니멀 테크노에서 들리는 일정한 박동처럼 그 순간 박자 자체보다 호흡과 몸의 미세한 떨림을 더 잘 느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색 앞에서는 색이 아니라 내가 어떤 방식으로 그 색을 바라보고 있느냐가 드러난다. 더 이상 그림이 나를 지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림 앞에서 나의 삶, 기억, 사건들로 관람 경험을 채운다. 이 점에서 모노크롬은 매우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이다.

4. 우리는 이미 모노크롬 속에서 산다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모노크롬의 사례는 스마트폰이다. 우리의 화면은 검거나 흰색이지만, 우리는 그 작은 공간 속에서 수많은 감정과 정보를 소비한다. 색이 단순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의미를 투사한다. 또 예능 프로그램을 떠올려보자. 많은 아이돌들이 희거나 검은 단색 배경 앞에서 안무 영상을 촬영한다.

 

배경이 단색일수록 움직임이 선명해지며, 오히려 감정 선이 날카로워진다. 흰 색 가득한 무대 위 블랙핑크의 댄스를 보며 마치 음악이 멈추더라도 움직임 자체가 소리를 만드는 것처럼 느끼는 순간 그것도 모노크롬의 수행성이다.

5. 현대 미술 속 모노크롬이 말하는 것

  • 바넷 뉴먼 – 색이 아니라 ‘틈’을 본다. 화면을 가르는 선은 인간 존재의 외로움처럼 보인다.
  • 마크 로스코 – 부유하는 색 덩어리는 감정의 무게다. 하나의 색 너머로 수많은 색이 번짐처럼 스며든다.
  • 요셉 알버스 – 색 간의 관계 실험. 같은 색도 주변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회에서 누군가를 바라보는 방식과 닮았다.
  • 이브 클라인 – 색은 개념이며 신체의 반응이다. 화면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심박수가 변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모노크롬은 결핍이 아니라 초과라는 것을 말이다.

6. 마치며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눈앞에는 수많은 문장이 열거되어 있지만, 실은 하나의 서정, 하나의 사유만이 반복되고 있다. “색은 무엇인가.” 혹은 “나는 지금 이 색을 내 삶의 어느 지점과 연결시키고 있는가.”라는 생각이다. 하루 끝, 불 꺼진 방 안에서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어둠의 양을 지켜본 적 있는가.

 

현대 미술 속 모노크롬은, 단 하나의 색이 아니라 나 자신을 마주하게 하는 거울이다. 거기엔 서사가 없다. 감정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왜 이 감각이 나에게 온 것인가” 질문하게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 사람은 종종 가장 단순한 것 앞에서 가장 복잡한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 것이다.

 

모노크롬은 바로 그 자리, 단순함이 복잡함을 깨우는 그 틈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예술을 찾는 이유도, 그 틈에 서고 싶기 때문인지 모른다. 색이 아닌 것들의 색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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